김숙
전)중등학교장
스마트폰 화면에서 습관처럼 뉴스를 스크롤했다. 〔화제〕라고 표시된 부동산 관련 머리기사가 엄지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초근접 더블 역세권에 하이브리드 오피스를 분양한단다.
막연한 호기심이 발동했던지 나도 모르게 화면을 터치했다. 분양 조건에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전매제한도 없다고 하였다.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고 안정적인 임대 수입이 보장된단다. 내게는 ‘개발에 편자’ 같은 기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일 수도 있겠다.
속된 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지하철역이 따불로 있다지 않은가. 가진 돈 확 들이부어 ‘돈 놓고 돈 먹고자’ 하는 식의 투자자에게는 얼마나 호재일까. 한참을 요리조리 상상하다가 애먼 전화기 면상만 보살님 염주 헤아리듯 드래그했다.
역세권이라는 말은 지하철이 들어서면서 생겼을 법한 유행어나 신조어였는데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건재하다. 어떤 이는 역세권을 ‘Stations sphere of influence’라고 영문으로 표기했는데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알려진 바대로 이곳은 철도역 및 주변의 편리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일컫는다. 중심 반경 250m에서 500m 정도의 범위로 역과 주거지를 5분에서 10분 사이에 걸어서 오갈 수 있다.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진 동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보통 역세권이 그럴진대 내가 읽은 머리기사에는 근접을 넘어서 초근접 더블 역세권이라 했으니 얼마나 좋다는 이야기일까. 그뿐만 아니었다. 트리플 역세권이라는 광고도 있었다. 따불을 넘어 따따불에 가까운 셈인데 어쩌다 한 번씩 역 근처를 스치는 행인으로서는 그 정도를 가늠할 길이 없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세권이 즐비했는데 손가락 끝을 움직일 때마다 ‘꿩보다 닭’ 같은 정보가 눈길을 끌었다. 머리소리만 바꿔 붙여 패러디한 신생어들이 너울성 파도로 밀려왔다. 슬세권, 쓱세권, 쿠세권, 스(별)세권, 맥세권, 뷰View세권, 백세권, 몰세권, 학세권, 숲(Park)세권, 골세권, 수세권, 주세권, 락세권 도세권, 병(의)세권, 편세권, 올All세권, 견세권, 심지어 욕세권도 있었다. 자빠진 김에 쉬어 가더라고 더블 역세권에 반하다 세상 모든 세권勢權의 바람에 떠밀렸다. 의도치 않은 파도타기를 즐기다 그 위력에 멀미가 날 지경이 되었다. 뉘엿거림에 주의하며 내가 본 세권을 하나씩 복기해 본다.
사실 역세권으로부터 확장된 다른 세권들은 ‘둘 이상의 실질 형태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가 된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언어의 변화와 새로운 구성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인지와 약속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라는 언어의 사회성과도 괴리된다. 그런데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해가 되는 건 우리말의 우수성일지.
먼저 슬세권이라는 한 무리의 파도가 밀려왔다. 슬세권은 슬리퍼의 슬과 세권을 합쳤다. 실내화로나 인식했던 슬리퍼의 범주에 온갖 생활권이 갖춰졌다는 뜻이겠다. 슬리퍼만 신었겠는가. 후드 달린 헐렁한 체육복 차림으로 슬슬 돌아다니면서 할 일 다 하고 여유를 부리는 곳이 슬세권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대로를 활보하는 위세의 당당함이라니.
이젠 장바구니 따위를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주문만 하면 쓱 배송해 준다는 쓱세권과 회원으로 가입하면 소량의 물건도 현관까지 배달해주는 쿠세권이 있다. 물류창고가 있는 곳이나 대형마트에서 꼭두새벽에도 요긴한 물품을 배송해 준다. 육아와 직장 일로 바쁜 사람들에게는 물론 1인 가정에도 인기 만점이겠다.
스(별)세권과 맥세권은 또 어떤가. “스타벅스는 커피를 팔지 않는다. 스타벅스는 스타벅스 자체를 판다.”라는 말로 유명한 카페가 주변에 있거나 맥도날드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 동네를 말한다. 햄버거를 주문한 후 배달까지 대략 17, 8분이 걸린다고 하니 배고픔으로 허둥댈 일이나 출출한 밤에 야식 준비를 걱정할 일이 없겠다. 맥딜리버리 버거로 충만해지면 이번에는 시선을 창밖으로 보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