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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이 낳은 출향 한학자- 동양고전연구가 묵점 기세춘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19년 07월 11일
ⓒ e-전라매일
재야 운동가이자 한학자
지난 7월 3일 수요일 저녁, 서울시 종로에 있는 문화공간 ‘온’에서는 전북민주동우회(이하 ‘전민동’) 월례모임이 열렸다. 전민동의 월례모임은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 진행된다.
전민동의 7월 월례모임의 초청 연사는 정읍시 출신의 60대 재야 학자였다. ‘인간의 척추와 올바른 걸음걸이’에 대해 강의했다.
이날 전민동의 월례모임엔 80대 중반의 한학자이자 동양고전연구가인 노학자도 참석했다. 그 역시 정읍시 출신이었다.
묵점 기세춘. 그의 호는 묵점이다. 중국 고대 사상가인 묵자와 고향인 정읍시 북면 태곡리 먹점마을에서 한 자씩 땄다고 한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 아래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전북 출신 민주 인사들의 모임인 전민동. 그 전민동의 원로인 기세춘은 1937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대전광역시에 거주하고 있다.

10세 때 사서삼경을 뗀 사상가
기세춘은 자타가 공인하는 ‘좌파 사상가’다. 동양고전연구가인 그는 우리나라 민중운동사를 대표하는 재야 운동가다. 그는 4·19혁명에 가담했고, 5·16 쿠데타에 좌절해 동학혁명연구회를 만들었다. 통일문제를 연구하다 1968년 통혁당사건에 연루됐다. 고 신영복 교수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기세춘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고봉 기대승의 15대손이다.
기세춘의 큰할아버지는 기삼연이다.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이다. 의병대장이자 큰 할아버지인 기삼연의 동생 기동우는 전남 장성에서 전북 정읍시 북면으로 이주했다. 서당 훈장을 했다. 그 무렵 정읍 이평면에선 동학농민혁명의 영웅 전봉준이 서당 훈장을 했다.
유년기 서당에 다녔던 기세춘은 나이 10세에 사서삼경의 최후의 경전인 ‘주역’도 뗐다.
기세춘의 선친은 좌익활동을 했다. 의병장 할아버지와 좌익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세춘의 저항의식은 남달랐다. 전주사범 재학 시절, 의혈동지회를 결성했다.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모임이었다.
일찍 ‘저항’의 길로 들어선 기세춘은 서울교육청에 근무한 바 있다. 종로도서관에서 근무할 때는 민주당 부대변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당시 ‘금서’들을 몰래 대출해주는 창구 역할을 했다.
전주사범 선배이자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교육평론’ 잡지에 취재부장으로 일한 바 있다. 이 시기에 기세춘은 ‘일제의 아류 교육’을 비판하기도 했다.
ⓒ e-전라매일

신영복 교수와‘중국역대
시가선집’4권 공동 번역
기세춘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1963년 동학혁명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을 맡았다. 전봉준의 법정 심문기록인 ‘공초’를 독회하며 공부했다.
고 신영복 교수가 동학혁명연구회의 학술위원장을 맡았다. 신영복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 선고와 무기징역 등을 선고 받고 무려 22년이나 복역했다.
신영복 교수는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기세춘과 공동으로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의 방대한 번역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기세춘은 2007년 ‘장자’를 완역했다.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성리학개론’도 출간했다.
ⓒ e-전라매일

자타가 공인하는 주역의 대가
기세춘은 8년 전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천만다행으로 암세포는 다른 부위로 번지지 않았다. 아직도 걷기는 불편하지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가 지난 8년 병마와 싸우면서도 놓지 않은 일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토대로 자신이 17년 전에 쓴 주역 저술의 개정판을 내는 일이다.
기세춘은 2002년 ‘주역’ 해설서를 출간했다. 그 뒤 스스로 절판시켰다. 그간 개정판을 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다산 정약용의 해석을 토대로 A4용지 3000장이 넘는 분량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2002년 ‘주역’ 해설서를 출간한 지 1년 만에 책을 절판시킨 이유가 뭘까.
기세춘은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주역사전)을 살펴 본 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그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이와 주희의 해석이 갖고 있는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의 해석은 정이나 주희의 해석과 달랐다. 이 때문에 기세춘은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접한 뒤 자괴감에 빠졌다.
기세춘은 그때의 충격을 이렇게 정리했다.
“정이와 주희는 주 문왕과 주공의 말씀을 봉건왕조에 맞게 의리(義理)학으로 풉니다. 다산은 의리를 떠나 문왕과 주공의 생각을 형상으로만, 즉 도그마가 없는 상징으로만 해석합니다.”
기세춘이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토대로 개정해서 내놓을 ‘주역’ 해설서의 첫 권엔 정이와 주희, 그리고 다산의 주석을 배치한다. 그리고 둘째 권엔 주역점을 치는 사전으로 꾸민다.
기세춘은 앞으로 내놓을 본인의 ‘주역’ 해설서는 불후의 명저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옥중 문익환 목사와 서신 논쟁
기세춘은 함석헌 선생이 살아생전에 강단에 섰던 한신대 신학대학원의 목요강좌에 출강한 바 있다.
또한 기세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서 번역자인 문익환 목사와 특별한 인연도 갖고 있다.
기세춘은 묵자에게서 마르크스의 평등과 예수의 사랑을 동시에 보았다고 했다. 그는 2000년 동안 금서였던 ‘묵자’를 국내 최초로 완역해 ‘묵자-천하에 남이란 없다’를 1992년에 펴냈다.
문익환 목사는 1990년대 초 감옥에서 기세춘의 저서를 보았다. 감옥에 수감돼 있던 문익환 목사는 기세춘에게 편지를 썼다. 문익환 목사와 기세춘이 주고 받으면서 벌인 서신논쟁은 훗날 책으로 엮어졌다. 책의 제목은 ‘묵자와 예수’ 였다. 1994년 펴냈다.
기세춘은 묵자와 어떻게 만났을까.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뒤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학원강사와 공장에서 기계 설계를 하고 있을 때 중국 동포 유학생 김향철 박사를 통해 묵자에 대한 몇 권의 중국 서적을 접했어요. 소스라치게 놀랐죠. 묵자에게서 예수와 마르크스를 봤기 때문이죠.”
묵가는 중국 전국시대만 해도 유가와 쌍벽을 이뤘지만 기원전 1세기 이후 유교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총칭할 때는 의례 ‘공·묵 등 제자백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묵자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맹자순경열전’ 끝머리에 짤막하게 언급된다. 2천년 뒤인 1894년 청나라 학자 손이양이 ‘묵자한고’를 펴낸 뒤에야 묵자의 사유가 다시 실체를 드러냈다. 손이양의 ‘묵자한고’가 나온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묵자 완역본이 나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고 한다.
기세춘이 그 학문의 역사를 썼다. 그가 1992년 묵자를 완역해서 출판했는데,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울=박찬복·서주원 기자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19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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