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노송에겐 ‘위안’이라는 남자 형제가 두 명이 있었다. 일찍 이승을 떠난 큰 형은 봉하노송에게 ‘법조인의 길’을 알려 주었다. 큰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둘째 형 편백 씨는 봉하노송에게 있어서 ‘보물’이라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편백 씨는 봉하노송의 대통령 시절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다. 동생의 대통령 재임 시절, 각종 이권 사업과 인사 문제에 개입해서 몇 차례 논란도 빚었다. 그러다보니 편백 씨에겐 ‘봉하대군’이라는 낙인도 붙어 다녔다.
지난해 11월 30일, S증권 매각 비리 의혹에 연루된 편백 씨가 집을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도 편백 씨는 봉하마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날은 봉하노송의 조모 기일이었다. 이 때문에 편백 씨의 집 앞에서는 많은 취재차량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편백 씨가 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귀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 날 오후 3시 쯤, 봉하노송은 사저 앞에서 봉하마을을 찾아 온 방문객들을 만났다.
“노송님, 형님의 검찰 수사에 대한 입장을 좀 밝혀 주십시오?”
방문객들 사이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봉하노송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검찰 수사를 기다려봅시다. 제가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봉하노송은 이렇게 짧게 대답했다. 이에 앞서 그는 방문객들에게 이런 인사말을 전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봉하마을을 찾아 온 방문객을 뵙게 되면 이런 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검찰 수사를 앞둔 편백 씨 문제와 관련해 봉하노송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무튼 오늘은 제 기분이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할 실마리가 잘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멀리서 찾아오신 여러분을 위해서는 인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 좋은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만 정말 죄송한데요, 염치 불구하고 오늘은 출세에 대한 의미를 주제로 한 저의 교육관과 남북관계 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 봉하노송은 약 1시간 동안 방문객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다음 취재진의 잇따른 질문을 뒤로 하고 사저로 돌아갔다.
나흘 뒤인 12월 4일, 편백 씨는 구속 수감됐다. 편백 씨는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보름 만에 구속됐다. 그간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던 편백 씨는 구속 수감되면서 일부 혐의는 인정했다.
편백 씨가 구속 되는 날, 봉하노송은 하루 종일 사저에 머물렀다. 그는 12월 1일 부터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은 방문객과 만나지 않기로 정해 놓았다. 그래서 그 날은 사저 앞 만남의 광장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그는 사저에서 나와서 만남의 광장에 섰다.
“대통령님, 안녕하세요?…대통령님 반가워요?…노송님 만세!…”
이렇게 환호하는 방문객들 앞에서 봉하노송은 머리를 숙였다. 배꼽 아래에 두 손을 모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여러분, 날도 추운데 이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좀 구해야 되겠습니다.”
봉하노송이 이런 말을 하자 방문객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사실 말이죠. 오늘은 여러분을 만나러 이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홈페이지 있지요. 사람 사는 세상이라구요. 이 홈페이지에 방문객을 맞이한다고 공지가 되어 있어서 부득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모 언론사 기자가 물었다.
“아니 노송님, 이 시점에서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봉하노송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눈을 뜨고 답변했다.
“죄송합니다. 사저의 여러 참모진 중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먼저 국민 여러분께 사죄를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지켜야 될 도리도 있겠습니다만 피를 나눈 형님에 대한 동생의 도리도 있더군요. 혐의가 사실로 확정될 때까지 저는 형님의 말을 앞지르는 판단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형님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데 제가 국민 앞에 사과를 해버리면 형님의 피의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죄송합니다.…”
봉하노송이 이렇게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형님 편백 씨가 노송님에게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기자님, 죄송합니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로 덮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와 형님 간에 전화통화가 있었다 없었다는 것이 궁금하시겠지만 저희 형제끼리의 문제로 덮어 주셨으면 합니다.…”
봉하노송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말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구요.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잘 마무리 하십시오. 이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뵙도록 하시죠. 아무튼 오늘 여러분께 올리는 이 인사를 끝으로 사저를 찾아오시는 여러분께 올해 인사를 마감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내년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봉하마을을 찾아 온 방문객들에게 꽃 피는 춘삼월의 만남을 약속한 뒤 봉하노송은 사저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