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 공감, 톡톡! 이 달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선정 ‘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19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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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백년의 삶보다 조국을 위한 짧은 삶을 선택한 영원한 청년의사 윤봉길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윤봉길 의사는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 후, 한학을 수학하였습니다. 또,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민족잡지인 개벽과 동아일보 등의 신문을 읽으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의사는 일찍이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19세에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개혁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의거 당일, 수많은 인파가 모여 삼엄한 경계가 처진 가운데 단상위에는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 수뇌부들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11시 40분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 의사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이 의거로 일본의 수뇌부들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게 되었고,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제공=서부보훈지청 |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19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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