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은 그런 진하디 진한 핏줄로 엮였다. 그런데 핏줄로 엮인 같은 살붙이라도 부모자식 간의 정보다 조부모와 손주 사이의 정이 더 도탑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 다리가 천리’라는 속담이 있다. ‘한 치 걸러 두 치’라는 속담과 같은 말로 ‘촌수나 친분은 멀어질수록 더욱 사이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부모의 손주 사랑이 부모의 자식사랑 보다 더 웅숭깊을 때가 있다.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무조건적인 경우가 많다. 조부모가 손주에게 그런 사랑을 쏟아 붓는 가장 큰 이유는 친자식의 대를 이어 집안을 이끌어 갈 후손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는지.
나이에 상관없이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조부모가 손주를 바라보는 눈높이는 분명 다르다. 일반적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조급하다. 하지만 조부모는 느긋한 눈으로 손주를 바라본다. 조부모는 손주가 잘못을 저질러도 엔간하면 손주를 혼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손주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를 하려고 든다.
손주도 조부모의 그런 마음을 잘 안다. 아직 철이 나지 않은 손주도 본능적으로 조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그 자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손주는 조부모를 잘 따르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받드는 경향도 있다. 어떤 손주는 자기 부모 보다 조부모를 더 따르기도 한다.
예전엔 많은 할아버지들이 수염을 길게 길렀다.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손주가 고사리손으로 할아버지의 긴 수염을 힘껏 잡아당기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플 텐데도 철부지 손주를 혼내는 할아버지는 거의 없었다. 조부모의 이런 무진장한 이해와 배려를 싫어할 손주가 어디 있겠는가.
봉하노송도 손녀 방울이에게 이런 사랑을 쏟아 부었다. 어린 방울이가 부모인 호걸 내외한테 혼날 일을 저질러도 그는 “아이구 우리 방울이 개안타!”라고 하면서 편을 들고 나섰다. 그러면 방울이는 아장아장 걸어서 닁큼 봉하노송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방울이는 봉하노송의 첫 손주다. 지난 2004년 1월에 태어 난 호걸의 맏이로 올해 나이는 여섯 살이다.
세상에 나온 이래 방울이는 잔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제나이에 맞게 말귀도 알아들었고, 걸음마도 뗐고, 글자도 읽혔다. 젖먹이 때 방울이는 낯가림이 심했다. 모처럼 청와대에 찾아 온 방울이가 제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지러질 때도 있었다. 손녀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보려고 안달복날이 난 봉하노송과 봉하부인은 애가 달았다. 낯가림을 거둔 방울이가 겨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길만 하면 호걸 내외는 청와대를 떠났다. 이럴 때면 봉하노송은 허탈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방울이는 틈만 나면 봉하노송과 그미의 품으로 달려들어 아양을 떨었다. 그럴 때 마다 봉하노송과 그미의 온몸은 함박꽃으로 변했다.
글자를 익힐 즈음, 방울이는 봉하노송과 그미한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졸라댔다. 읽어 주는 동화가 싫증이 나면 방울이는 장난감을 내밀며 같이 놀자고 떼도 썼다. 봉하노송과 그미는 방울이의 그 어떤 변덕과 앙탈도 죄다 받아들였다.
자식을 키울 때 손에 매를 들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봉하노송도 그런 적이 왜 없겠는가. 그러다보니 봉하노송은 그 옛날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자식들을 비켜 보았던 미안한 마음까지 보태서 방울이에게 사랑을 쏟았다. 방울이의 손에 사탕 한 개, 과자 한 봉지를 더 쥐어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봉하노송에겐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 오동보동 살이 오른 방울이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었다. 방울이와 눈을 맞추거나 손끝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는 얽히고설킨 국정을 운영하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렀다.
봉하노송은 방울이가 청와대에 찾아오면 목말도 태워 주었다. 방울이를 자전거 뒤에 태운 채 그는 청와대 안을 돌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봉하노송과 방울이는 청와대의 잔디밭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방울이의 입에 과자를 한 조각 씩 넣어 주었다. 그러던 중 그는 방울이가 과자를 받아먹으려고 딱 벌린 입안에 과자를 넣어 주는 척 하다가 슬쩍 자신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때때로 이렇게 어린 손녀를 상대로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난 우리 방울이한테 사탕이든, 아이스크림이든, 장난감이든 무엇이든지 다 사주고 싶었다. 네 엄마 아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사탕이나 초콜릿을 그만 먹으라고 널 혼 낼 때도 난 네게 사탕도 많이 먹이고 초콜릿도 많이 먹이고 싶었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언제나 보고 싶은 우리 방울이, 너와 눈을 맞추고 있으면 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고, 멀리 출타를 했다가도 네가 찾아온다면 귀가를 서두를 때도 있었다.…오리도 세상을 뜰 때는 따뜻한 오리털을 남기고 간다는데 나는 방울이를 포함한 우리 손주들한테 무엇을 남기고 이승을 떠나야 될꺼나?…인간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고 후원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온갖 고난 속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지지자나 후원자가 조부모 일 수도 있다는데, 나도 손주들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그런 할아버지가 되어야 할 텐데, 이것 참 면목이 없구나. 이 순간에도 눈에 밟히는 방울아, 너한테 단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 할아버지의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해 주려무나.…’
봉하노송은 그미와 호걸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거실 안쪽에 있는 컴퓨터용 책상 위의 작은 액자를 살짝 훔쳐보았다. 그 액자엔 봉하노송이 청와대를 방문한 방울이를 목말을 태우고 찍었던 사진이 담겨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