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 작> 봉하노송의 절명 제26회-최후의 만찬 13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03일
봉하노송은 봉하부인과 1973년 1월 29일 결혼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그 해 맏자식인 아들 호걸이 태어났다.
2년 뒤인 1975년 딸 호연이 태어났다. 그 해 4월, 봉하노송은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 호걸이 태어났던 1973년, 그 해 봉하노송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앞날은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런 때 호걸은 봉하노송과 봉하부인의 삶에 기쁨을 주었고, 가정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반면, 외동딸 호연이 태어난 1975년은 봉하노송이 입신출세의 길에 올랐던 해다. 청운의 뜻을 세우고 불가능에 도전한 그가 몇 차례의 고배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해다. 봉하노송은 호연이 ‘복덩이 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호연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물론 봉하노송도 자식 농사는 버거웠다. 호연이 서울에서 여고를 졸업한 뒤 재수를 할 때다. 봉하노송과 봉하부인 사이엔 이런 언쟁도 벌어졌다.
“호걸이 아버지, 나 좀 봅시데이.”
“와? 급히 사무실에 나가봐야 되는데, 무슨 일 있나?”
“당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닙니꺼?”
그미의 지청구가 시작됐다.
“이날 입때까지 단 한 시간이라도 애들 교육 문제로 깊이 고민해 본 적 있는교?”
“와 없겠노? 우리 호연이가 요즘 재수를 하느라고 무척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어제 사무실서 고민을 좀 해봤다.”
“글쎄 어떤 고민을 우째 했다는 겁니꺼?”
“내가 애들 교육을 잘 시켰나, 몬 시켰나 고걸 고민해봤다.”
“애들 어려서부터 당신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아십니꺼?”
“알제, 우리집 애들 만큼은 학교 성적의 노예가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맨날 놀렸다. 근데 고게 뭐 잘못 됐나?”
“애들이 국민학교 다닐 때 우쨌는지 아시는교?”
“뭘 우쨌는데?”
“등교하던 아이들을 끌고 강원도로 놀러간 적도 있지에?”
“입시 공부에 짓눌려 살면 인성 발달에 큰 문제가 된다는 확신 때문에 그랬던거다.”
“그러면서도 내가 애들한테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소리치면 당신이 날 더러 뭐라캤습니꺼?”
“뭐라캤는데?”
“호걸아, 호연아, 공부는 못해도 괘않다.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면 된다. 공부를 안 해서 니들 인생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땐 이 아빠가 책임지마. 뭐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래 앞으로 애들 인생을 어떻게 책임질랍니꺼?”
봉하노송은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학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간 큰놈은 입대 전에 간신히 4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작은 놈은 별로 쎄지도 않은 대학에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재수를 하고 있는데, 이 일을 앞으로 우째할랍니꺼?”
봉하노송의 대꾸가 없자 봉하부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 닮았으면 애들이 공부를 잘 할 텐데, 날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 모양인데, 둘 다 이 애밀 닮아 머리가 돌이가?…”
그렇게 자책을 늘어놓던 봉하부인의 지청구가 다시 쏟아졌다.
“당신이 아이들한테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 꼴은 아닐 것 아닙니꺼?”
“난 그리 생각지 않는다. 이 정도로 커 준 우리 애들을, 난 늘 고맙게 생각한다.”
“뭐가 늘 고맙다는 겁니꺼?”
“생각을 좀 해봐라. 두 놈 다 나보다 키가 크다. 또 두 놈 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공부는 별로지만 두 놈 다 건전한 시민이 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안 그렇나?”
봉하부인은 대답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내도 우리 애들이 기왕이면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길 바랬다. 근데 그건 과한 욕심이었다. 당신도 좀 생각을 좀 해봐라. 나도 그라고, 당신도 그라고 생김샐 생각하면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얼라가 태어나겠나? 얼토당토 않는 욕심 아이가?”
봉하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놈 다 생김새도 그렇지만 목소리도 나를 닮았다. 심지어 내 이마의 한일자 주름살까지 닮았다. 그러니 내가 애들을 탓할 건덕지가 어딨겠나?…”
지청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봉하부인의 입이 굳게 닫혔다.
“내도 애들한테 아무 할 말이 없다. 내가 무슨 불만이라도 토로하려고 나서면 아 이 녀석들이, 그건 아버질 닮아서 그런 거라고 쏘아 부치니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있겠노? 허허허!…”
그런 언쟁을 벌인지 10여 년이 지난 뒤, 봉하노송의 대통령 추임 직전에 가정을 꾸렸던 호걸과 호연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호걸은 자신의 유학을 위해 처자식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고, 호연은 유학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딸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지난 해 2월, 봉하노송은 청와대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친인척 비리로 임기 말에 큰 홍역을 치른 대계거송 대통령이나 후광거송 대통령과 달리 그는 시쳇말로 ‘죽지 않고 살아서’ 청와대에서 나왔다. 그런데 퇴임 뒤 15개월 만에 역사의 뒤안길에 몸을 던져야 되는 상황이다. 그가 내일 아침 거사를 치르려고 작정한 결정타는 몇 년 전 미국으로 건너 간 자식들 문제로 빚어졌다.
“아버질 바꿔 달라고?…어! 잠깐만 기다려봐라, 아버지 바꿔 드릴테닌까!…”
“호연이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다며 봉하부인이 봉하노송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계속) |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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