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규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본지 객원논설위원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 “삶은 유한하고, 물음은 영원하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누군들 벗어날 수 있겠는가. 삶과 죽음은 철학적·종교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삶과 죽음의 본질, 의미,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등을 탐구한다. 반면 종교는 삶과 죽음의 순환, 영원한 삶, 또는 사후 세계의 믿음을 제시한다. 누구든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음 맛을 봐야 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는 진실이며, 인간존재의 가장 확실한 운명이다. 삶의 허무나 슬픔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언뜻 보기엔 여유롭고 순탄해 보이는 이들도 들여다보면 한두 가지 고민은 안고 살아간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도, 재산이 수십조에 이르는 재벌도, 또 건강을 자랑하던 이조차도 어느 날 불시에 닥친 시련 앞에 무너질 수 있다. 시련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지위도, 명예도, 돈도 가려서 다가오지 않는다. 어떤 이는 가족의 문제로, 어떤 이는 돈의 문제로, 또 어떤 이는 병마의 시달림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긴 어둠 속을 걷는다. 우리는 때때로 ‘저 사람은 참 잘 나간다’고, ‘나는 왜 이리 힘든가’라고 비교하지만, 실상 누구나 그늘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어느 지인은 돈이 수십억 있다고, 아파트가 세 채나 된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에 투자했는지, 최근에 또 어떤 부동산을 샀는지, 그의 입에서는 늘 ‘성공’이란 단어가 맴돌았다. 듣는 이들이 부러워하기라도 하면, 그는 더 신이 나서 의기양양하게 거들먹거렸다. 그렇게 매번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걸 자랑하던 그가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 병원에 입원했대요. 수술도 받았고, 지금은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고 하네요. 상태가 심각하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세 채의 아파트도, 수십억 원도, 그를 병의 고통에서 구해주지 못했다.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해졌고, 생의 끝자락을 마주하고 있다. 그 많은 돈이, 그 화려한 자랑이, 이 순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삶이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평생의 탐구이다. 인간만이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대답을 찾아 나서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허무는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어떤 이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 믿음 속에서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죽음을 넘어선 세계에 희망을 둔다. 종교는 허무를 초월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 어떤 이는 철학과 문학에서 답을 찾는다. 존재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이다. 재물을 많이 가졌다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을 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깊은 공허와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내 삶을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 후회 없이 산다는 것은 완벽하게 산다는 뜻이 아니다.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실패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매 순간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냈다면, 그것이 바로 ‘잘 산 삶’이 아닐까? 남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삶이 값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엄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삶은 짧고, 허무하며,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허무함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며,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오늘도 병상 위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며, 삶이라는 형이상학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생은 누가 더 높이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올바르게 살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온전히 살아냈는가의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