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말은 길 위에 눕지 않는다 - 정성수
아침 이슬이 풀잎 끝에서 떨던 날 나는 이름도 없는 길을 따라 걷는 법을 배웠다 세상이 열리기 전의 세상이 나를 불러 세우고 바람이 뒤에서 등을 밀어주던 그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스무 살 젊은 날에는 작은 손가락에 어울리는 풀꽃반지가 되고 싶었다. 작디작은 꽃잎 하나도, 태양을 품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는, 누구의 손에도 꺾이지 않고, 누구의 발길에도 밟히지 않을, 야생의 숨결을 심장에 품고 살고 살았다. 미풍에 눈을 감고 칼바람에는 힘을 주면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팀은 무모한 꿈의 다른 이름이었고, 나를 베는 칼날이 되어, 위태로운 발끝에서 몇 번이나 나는, 나를 잃을 뻔했다.
바위를 치는 주먹은 하얀 뼈가 보일 뿐 뼈마저도 바람에 흔들리며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냈다 강해지고 싶어 주먹을 모았으나 세상을 떠받드는 것은 돌주먹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 다시 일어서는 무릎임을 뒤늦게 알았다
백양나무처럼 흰 몸으로 길을 걸어가는 내 젊음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한때 햇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던 새하얀 날들의 잔광은, 가느다란 줄기처럼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다.
빛이 먼 곳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걸어야 한다 내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늙은 말은 길 위에 눕지 않는다
• 저서 : 시집 공든 탑, 동시집 첫꽃, 장편동화 폐암 걸린 호랑이 등 95권 •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윤동주문학상, 황금펜문학상, 한국예총문학상. 전라북도문화예술창작지원금, 아르코문학창작기금.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콘텐츠 창작지원금, 익산시 효행스토리 도서제작 지원금 5회 수혜 등 다수 •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전주비전대학교운영교수 역임
• 현) 향촌문학회장, 사/미래다문화발전협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이사, 전라매일논설위원, 명예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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