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줄 넘어간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4월 02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허전하게 비어 있던 빈 들판, 수로에 콸콸 물소리가 흐르더니 트랙터가 써레를 달고 웅웅거리며 한바탕 다림질을 해 놓고 갔다. 이앙기가 다녀간 무논마다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색을 입히고 있다. 머지않아 저 들판이 초록으로 꽉 채워지고 하지가 지나고 긴긴 무더위와 천둥 번개를 견디고 나면 이삭이 고개를 숙이면서 차랑차랑 금빛 머리를 흔들며 농부의 손길을 기다릴 것이다. 수천 년 우리 민족의 주식으로 자리해 온 밥, 그 근원이 저 들녘에서 금빛 꿈을 야물게 키워 가고 있다. 모내기를 하는 날은 여느 때보다 더 이른 새벽부터 일손이 바쁘게 돌아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못자리판은 마을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못자리의 모를 찌러 온 이웃 어른들이다.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모를 찌고, 뿌리에 달린 흙을 고인 물에 두세 번 흔들어 씻어 낸 다음 다시 합쳐서 너 가닥의 짚을 모아 모 허리춤을 묶어 모춤을 만든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없다. 쪄 낸 모춤을 논 앞둑이나 뒤둑으로 건져 내면 아버지는 물이 빠진 모춤을 바지게에 담아 모내기할 논에 모춤을 빌린다. 아버지의 모춤을 빌리는 솜씨는 어느 사람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앞뒤 논둑에서 적당한 각도로 모춤을 던지면 원하는 위치에 적당한 간격으로 미끄러지듯 멈추어 선다. 모춤을 시원찮게 묶는다거나 요령 없이 모춤을 빌리면 모춤이 풀어져 낭패를 겪게 된다. 모를 찌고 무논에 빌리는 일은 아침 식전의 일이다. 농촌에서 식전 4시간은 한나절의 품이다. 따라서 모내기 철의 하루는 평소보다 한나절의 노동을 추가하는 고된 시간이다. 못줄잡이는 목청이 좋고 노랫가락도 술술 뽑아내는 두 고모부가 담당이다. 아버지는 밑거름 비료를 뿌리고 우리 형제는 모잡이의 적당한 뒤편에 모춤을 나눠 주는 모쟁이를 한다. 모쟁이가 뒤에서 모춤을 뒤돌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모춤을 풀어 놓아야만 모잡이들이 서로서로 손을 맞추어 같은 속도로 한 줄의 모를 심을 수 있다. 모잡이는 둘씩 짝을 이룬다. 양옆에 있는 사람과 교대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심는 각자의 길이가 조정된다. 모잡이들이 못줄의 꽃눈을 따라 모를 심으면 줄잡이가 다 심은 것을 확인하고 “이쪽에서 줄!” 하고 외치면 저쪽에서 다 심은 것을 확인하고 줄을 받아 외치며 못줄은 옮긴다. 미처 다 심지 못하고 못줄이 옮겨지면 모잡이가 “나, 식은 밥 먹고 있어”라며 잠시의 틈을 요구한다. 그러는 사이 다른 모잡이들이 잠깐의 허리를 펼 기회로 삼는다. 그러니 모내기의 속도는 줄잡이의 요령에 달려 있다. 정신없이 몰아치다 보면 모잡이들이 허리 한 번 펼 틈조차 없다. 새참은 주로 막걸리와 국수가 나온다. 막걸리는 소재지 주조장에서 진빠에 매달고 달려온 통 막걸리가 나온다. 국수 한 사발에 양재기 한가득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어른들은 궐련 한 대 피워 물고는 다시 논으로 들어간다. 점심은 어머니와 이웃 누나들이 광주리에 밥과 국, 그리고 그릇과 반찬을 머리에 이고 길가에 포장 하나 펴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잠시나마 허리를 길게 펴 보는 시간이다. 꿀맛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 점심시간도 잠깐이다. 논 주인이 먼저 논바닥으로 들어가고 줄잡이가 모잡이들을 논으로 밀어 넣는다. 모내기는 해가 서산을 넘고 어스름이 내려야 끝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심던 논배미는 다 마쳐야 모내기를 마무리한다. 농촌의 모내기는 많은 사람이 손을 맞추어서 해야 하는 일이기에 모두가 품앗이한다. 품삯을 돈으로 주는 일은 없다. 나절나절로 계산해서 서로 같은 농작업이나 또는 다른 농사일로 품을 갚는다. 오늘날처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두말없이 손 털고 일어나는 일도 없다. 남은 마무리를 다 해야 했다. 농촌 마을 두레 공동체의 품앗이 인심이었다. 모잽이의 장난기 섞인 구수한 목청과 논둑을 넘는 마을 아지매들의 유행가 소절들이 귓가에 생생하다. 모내기가 끝나면 어머니께서 못밥 퍼 낸 가마솥 밑바닥에서 긁어 세운 노릇노릇한 누룽지를 덤으로 챙겨 주셨다. 인구 절벽에 갇힌 나라, 그중에서도 아기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농촌의 고향 마을에서 이 넉넉한 풍경들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일까. 기계화 그리고 편리함이 우리 농촌을 더 삭막하고 인정을 메마르게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막걸리 한 사발이 고된 피로를 잊게 해 주던 모내기의 풍경은 사라지고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만 들녘에 요란하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4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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