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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유산(2-4)] 장날의 삽화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20일
“천연탈취 편백나무 베개요, 한 개에 만 원, 세 개에 이만 원.” 장날, 트럭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다. 장이 서는 입구를
꿰찬 베개 장수가 편백나무 효능을 장마당에 차곡차곡 쌓는다. 카세트테이프가 외워대는 항균, 천연탈취, 알레르기 효능 중 내 귀를 솔깃하게 한 것은 천연탈취다. 꽤 오래된 고독을 지우려 방 가운데 방향제를 놓아 보고, 냄새 잡는다는 페브리즈를 얼 룩지도록 뿌려대도 지독한 홀아비 냄새 앞에선 무용지물이었 다. 오히려 이상한 냄새를 만들어내 찾아온 지인들의 코를 고통 스럽게 했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니 편백나무의 천연탈취 효능이라는 말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더하여 세 개에 이만 원이라 니. 하나는 내가 쓰고, 한 개는 방향제로 방 가운데 매달아 놓고, 나머지 하나는 이발소 영감에게 선물로 안기리라. 이발소 영감 은 내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그것도 공짜로 깎아준 적이 있었 으니 보은할 기회이겠다 싶어 스피커를 향해 갔다.
다가갈수록 베개 장수의 외침이 무색하게 베개를 사는 사람 은커녕 값을 물어보는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평소 물건 을 선뜻 사는 습관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 아니었기에 상황을 살피려고 걸음을 멈췄다. 뭔가 문제가 있는 물건은 아닌 지 의심이 들 때쯤 맞은편에서 한 여성이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베개 장수를 향하고 있었다. 유치원생쯤으로 보 이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여성은 이윽고 베개 장수 앞에 섰다. 옳거니, 나는 여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근처 카세트테이프와 시디를 파는 가판대 뒤에서 딴전 부리 듯 서성거렸다. 잘 팔리지 않는 테이프인지 묶음으로 묶인 가 수들이 가판대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70년대 유행했던 김추 자의 노래 ‘거짓말이야’가 장마당 골목을 휘돌아 멀어지고 발치 의 검은 염소는 더 큰소리로 오일장을 알린다. 그때, 베개 장수 와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던 여자가 지폐를 쑥 내민다. 따져보지 않고 물건을 사는 버릇에 관한 한 저 여자가 나보다 한 수 위 임이 분명했다. 코앞에서 베개를 사는 사람도 보았겠다, 동했던 마음이 급해졌다. 여자가 베개를 들고 골목으로 사라지기 무섭 게 재바른 걸음으로 베개 장수 앞에 섰다.
“거, 향이 정말 오래가는 거요?”
일 년은 유지된다는 말에 나는 결국 세 개의 베개가 담긴 비 닐봉지를 의기양양 받아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잘 샀다는 생각을 뿌듯하게 펼쳐 놓았다. 진하지는 않았지만 편백향이 분 명히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향은 온데간데없었다. 편백향 에 동화된 코 때문인지 싶어 몇 번을 밖에 있다가 들어와 맡아 봐도 마찬가지였다. 비닐봉지에 갇혀 있던 냄새가 잠깐 풍기고 말았던 것이다. 또 물렸다는 생각이 그물처럼 덮어왔다. 지퍼를 열고 베개 속을 들여다보았다. 편백나무 향을 내는 주사위 모 양의 알맹이는 한 개도 없고 나무를 자르고 남은 톱밥 같은 찌 꺼기가 전부였다. 내용물을 모두 쏟아보니 비닐 조각에 담배꽁 초도 나왔다. 이발소 영감에게 건네주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진짜를 위장한 가짜. 이에 버금가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 것은 ‘루어lure’다. 루어는 꾀거나 유혹한다는 의미로 가짜 미끼를 달아서 하는 낚시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루어 낚시에 걸린 물고기인 셈이다.
단 3초라는 붕어의 기억력처럼 편백나무 베개에 얽힌 기억이 사그라질 때쯤 함평장을 향했다. 장날은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 고 설레게 하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찾곤 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남짓인 함평장은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함평 천지에 들면 실처럼 풀린 들길이 여유롭 고, 차창 밖 손바닥만 한 들녘의 볕들이 오종종 모여 있어서 정 겨움을 자아낸다.
알록달록 장마당을 알리는 파라솔이 걸음을 재촉한다. 바지 락을 파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지나, 생선가게 앞에서 흥정하 는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인다. 남도의 구수한 억양이 친근감을 더 한다. 장마당을 돌며 사라져가는 지역어를 채집하고 삶의 진경 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일은 늘 새롭다. 삶의 모퉁이마다 이야 기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을 때는 어떤 장면을 먼저 받아써야 할 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뻥튀기 장수의 외침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몰려온다. 사람들 의 흥정 소리와 뻥튀기의 고소함이 골목의 좌판 위까지 쌓인다. 물건값을 흥정하는 언사는 소통이고 인연이라는 걸 느낄 때쯤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갔다. 다가갈수록 두 근거렸다. 똑같은 목소리, 적재함에 기대어 있는 사람은 분명 그 베개 장수였다. 부안장에서 나를 낚았던 사람이었다.
한참 동안 서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오토바이가 비키라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주춤주춤 베개 장수에게 다가서며 따질까 망설이는데, 낯익은 여자가 눈에 띄 었다. 길 건너에서 다가오는 여자는 분명 부안에서 베개를 사 들고 간 그 여자였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도 영락없이 똑 같았다. 오호라! 저 여자도 베개 장수에게 따지러 가나? 내친김 에 합세할 생각으로 여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안에서처럼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연합하여 저 베개 장수를 혼내 주자 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여자는 나 를 지나쳐 스피커 소리를 향해 점점 다가갔다. 이제 벌어질 다툼 에 대해 상상하며 오도카니 서 있었다. 바투 쥔 손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여자는 베개를 사 들고 태연 히 사라져갔다. 묘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좀 더 지켜보려고 근처 노상의 튀김집에 들었다. 튀김 한 접시를 비우는 동안 여자는 두 번을 더 찾아와 같은 베개를 사 들고 갔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 음이 나왔다.
어느덧 노을은 베개 장수의 녹음기 소리를 덮어가고, 마지막 외침인 듯 뻥튀기 장수의 쉰 목소리가 들려온다.
“뻥이오!”
곡물을 기계에 넣어 부풀려 나오는 뻥튀기는 진짜에서 비롯 된 가짜이며 고소한 가짜다. 내가 구입한 베개도 편백향만 나지 않을 뿐 그럭저럭 베개로 사용한다. 어찌 보면 가짜도 생의 장 마당에서는 필요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선다.

/배귀선
시인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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