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름대로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리라. 그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오히려 저 추억의 밀실 속에 깊이 감추어 두고 자신이 외로워질 때마다 조금씩 은밀히 꺼내어 향수에 젖어보곤 하리라. 아름다운 추억에는 늘 푸른 고향 뒷산의 숲처럼 그리움이 있고 향기가 있고 때로는 흐려져 가는 영혼까지를 정화시켜 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나에게도 단 한 가닥일망정 언제나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17년 전이다. 전남 신안군 비금중학교로 발령이 났었다. 딱 6 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섬 생활이었지만 지금껏 내가 간직해온 그 어느 추억보다도 선연하고 가슴이 아리다. 그때 난 내 고향 남원 산골에서만 줄곧 30여 년을 살아 왔었 기에 비록 초등에서 중등학교로 승진해 가는 전보라 할지라도, 고향과 처자를 두고 홀몸으로 떠나야 된다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지도책을 펴보니 목포에서 흑산도와 홍도를 가는 길목에 있는 섬이었다. 가족들과 주위에선 한사코 말렸지만 난 그 때까지 9년간 몸담고 있던 초등계를 그만 두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멀고도 외로운 비금도를 택했다. 덥덥하고 느슨한 생에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갖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섬 생활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집’이라고 하는 나의 울타리를 한 번 벗어나보고 싶은 충동 같은 게 있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5시간쯤 걸린 먼 곳이었다. 여객선의 객실은 마치 옛날 시골의 사랑방처럼 퀴퀴하고 어둑했다. 즐비하게 가로 세로 눕거나 앉거나 혹은 소주를 마시며 소위 ‘삼봉’이라고 하는 화투를 치며 무료한 시간을 표정없이 보내고 있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육지의 면단위보다도 약간 큰 면적이었다. 어업과 농사와 염전이 주업이었다. 배가 닿는 선창에서 섬의 중심 부에 위치한 중학교와는 6km쯤으로 기억되는데, 정기 운행하는 차가 없어 부임하는 그날도 짐을 싣는 경운기를 타고 갔었다. 그곳은 물이 참 귀한 곳이었다. 우리 하숙집에도 마당 가운데, 큰 저수탱크가 있었는데 지붕에 내리는 빗물을 이곳에 모아 식수와 허드레 물로 쓰고 있었다. 일요일이 되어도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에 별로 갈 곳이 없었다. 더구나 배편[船便] 사정이 좋지 않아 며칠간의 연휴가 아니고서는 섬을 빠져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기에 주말만 되면 우리들은 이집 저집 동료들의 하숙방을 싸돌아다니면서 두고 온 고향이며 대학시절과 군대이야기 등으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그러던 오월 어느 일요일. 명산리란 마을로 우린 가정방문을 갔었다. 들에서는 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오고 야산 청솔가지에선 산꿩이 한가롭게 울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정말이지 이를 두고 무릉도원이라고 하였던가! 들판에는 자운영꽃이 만발하고 핑크빛 복숭아꽃들은 불붙는 듯 온통 마을을 감고 돌아 잉잉대는 벌떼 속에 낮잠을 즐기는 명산리는 한 폭의 선명한 동양화였다. 어찌 알았는지 학생들이 마을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서로 먼저 자기 집으로 가자고 손목을 이끌던 일. 바닷가에 나가 여학생들이 따준 굴을 안주삼아 쏴-쏴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일, 물장난을 치며 뛰고 달리던 그 널따란 백사장의 추억들이 지금껏 마음 한 구석에 낮달로 걸려 간간이 취기(醉氣)처럼 그리움을 몰고 오곤 한다. 저녁이면 아무도 몰래 꽃을 한 아름 꺾어다 놓고 도망치던 여학생들. 동생처럼 따르며 나의 음악선생이 되어 많은 노래를 가르쳐 주었던 하숙집 딸 금순이, 밤바다 낚시를 가자고 약속만 했던 수협(水協) K양....... 그들도 지금쯤은 누구네 집 애 엄마가 되었으리라. 그리하여 어느 하늘 밑에서 나처럼 이렇게 살고 있을까?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를 부르며 그들과 마지막 수업을 보냈던 그 교정, 그 오솔길, 그 서늘한 눈망울이 파도소리와 함께 지금도 내 가슴에 여울져 흐른다. 아! 그리운 비금도, 언제나 마르지 않을 내 고운 추억의 샘. 비금도여(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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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금도 명사십리 해변 |
/김동수 시인 전라정신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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