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여사, 미수에 그치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09월 03일
냉장고 문을 연다. 삐걱대는 소리가 갈수록 더한다. 어머니 생전에 쓰던 것을 이어 쓰고 있으니 어림잡아 냉장고 나이가 삼 십 년은 넘은 것 같다. 손님이라도 와 누렇게 바랜 냉장고 문 여 는 소리를 들으면 좀 근천스러워 보이기도 하겠으나 나에게는 친근한 소리다. 어떤 때는 내 기억 속 어머니의 정지 문짝에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여 편안해지기도 한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등하교할 때,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도 착하면 습관처럼 삐걱거리는 정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무등끄려져 있었다. 아침밥을 지은 뒤 고구마를 끝불 속에 넣어두고 일터로 나가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지에 들 어서자마자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 식은 재를 뒤적거리곤 했다. 급하게 아궁이를 뒤적거리기라도 하면 재는 시렁 위 그릇이 며 옆에 걸린 주전자에 얌체처럼 앉아 어머니를 더 힘들게 했다. 주전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넘 어가야 할 것 같다. 시커멓게 그을린 흙벽에 매달린 노란 주전자는 내가 초등학 교 6학년이었던 그 당시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거리였다. 왜 아 니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노란 주전자를 우물에 빠트려 담 임 선생님으로부터 폭력을 겪은 내게 주전자는 특별한 물건이 었다. 게다가 유리병을 들고 막걸리 심부름하다가 깨트린 적이 한두 번 아니었기에 누런 주전자는 나에게 대단한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됫박 술을 유리병에 담아오면서 홀짝거리는 버릇없 는 행동이 들키지 않아서 좋았다. 배고픈 시절, 두어 모금 들이킨 열서너 살의 걸음은 취기로 기고만장도 하였으나 귀신 같은 아버지의 술맛 앞에서는 고양 이 앞의 쥐였다. 이러한 내 주벽을 그래도 감춰준 물건이 주전자 였다. 주전자에 받아온 막걸리는 그 내용물이 보이지 않아 물을 첨하지 않아도 무관하였다. 어쩌다 점방집 할매가 네모난 됫박 한쪽 귀퉁이를 지울 만큼의 양이라도 덤으로 부어주면 그 몫은 내 차지였다. 그런 날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뒷산에 올 라 솔가리 나무를 하거나 물항아리를 채우는 일을 힘든지 모르 고 해댔다. 어찌 되었든 내 음주는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노란 주 전자도 한몫 거든 셈이다. 이쯤에서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 가야 할 것 같다. 나무 돌쩌귀에 의지한 채 기울어진 어머니의 정지문은 얼멍 얼멍하여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선지 동네 사람들은 격 의 없이 어머니의 정지를 자주 찾았다. 휘어진 문턱을 넘어서면 정지 바닥보다 낮은 아궁이 터가 움푹 둘려 있었고, 정지 바닥 은 이웃의 정 묻은 잔걸음으로 반질반질했다. 어머니 친구들이 둘러앉은 아궁이 앞은 늘 불땀처럼 이야기가 타올랐다가 사그 라지곤 했다. 그중에 방물장수도 가끔 끼어들곤 했는데, 방물장 수는 우리 동네에 오기만 하면 어머니를 먼저 찾았다. 머리카락 을 뱀 똬리처럼 둘둘 말아 비녀를 꽂은 방물장수는 어머니보다 정갈했다. 무엇보다 짙은 분 냄새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옹색 한 살림에도 어머니는 방물장수 앞에 밥상을 내놓곤 하였는데, 염치 좋은 그녀는 새비젓에 김칫국물을 넣어 쓱쓱 비빈 밥을 게 눈 감추듯 비웠다. 보은이랍시고 방물장수가 커다란 눈깔사탕이라도 하나 내 입에 물려주면 어머니는 넘새밭 가장자리를 채 근하여 갈무리해 놓은 메주콩을 퍼주었다. 당시, 방물장수의 역할은 대단했다. 사윗감이나 며느릿감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 대한 소식도 접할 수 있 었으니 그이는 장사꾼이자 소식통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한다 면 상당한 속도와 용량을 지닌 컴퓨터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방물장수와 어머니가 동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친한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꺼내놓고 다녔는데, 거기에는 나름 의 동맹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그 방물장수에게 친절을 베 풀었던 것은 어머니도 그 일을 해보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한 어느 날 내가 두 눈 멀 쩡히 뜨고 있는데 지금 무슨 수작을 하는 거냐며 방물장수와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그날 이후 과수댁 방물장수는 우리 집 정지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를 따라나서 사업(?)을 도모하려 했던 어머니, 김 여사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내심 방물장수 같 은 깨끔한 어머니의 모습과 보따리에 담긴 달달한 주전부리가 눈앞에 어른거려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란이 사그라지는 동안 나는 판자를 덧 댄 정지문 틈으로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어느 때고 삐걱거리는 정지문을 박차고 나가 방물장수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영글어 가는 동안 절은 수건 머리에 쓴 채 울퉁불퉁 한 정지를 떠나지 않으셨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삐걱, 어머니의 정지문 소리처럼 들린다. 세상의 모든 낡은 소리는 그리움의 소리이지 싶다.
/배귀선(시인)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09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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