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왕족의 이름처럼(김숙 수필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0월 21일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지 싶다. 새로운 난이도의 학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까. 아버지가 “네 이름은 물가 숙이야.”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네모 칸 공책에 삐침과 파임, 가로획과 세로획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완성한 글자는 쇠 金, 물가 淑이었다. 나는 뭔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저 아버지가 적어 준 이름을 새로 받은 화두처럼 뇌이며 방바닥에 엎드려 쓰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서도 외우고 눈을 감고도 말했다. “물가 숙, 물가 숙, 물가 숙….” 물가 숙을 떠올리면 물이 흐르는 시냇가가 연상되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냇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냥 흐르지만, 아버지가 일러 준 물가는 왠지 버들강아지가 피어나는 봄날의 냇가로 나를 이끌었다. 흘러가는 물소리는 공명이 잘된 타악기 소리 같았다. 그 곁 들판엔 나물 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농부들은 밭을 갈며 희망에 찼고 온 세상은 생기발랄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내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의 의지가 담긴 ‘물가’였다. 1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과 면담이 있었다. “한자 이름이 맑을 숙이구나. 한 글자여서 외롭지 않겠니? 맑음이라…. 맑음이라고 하면 어때 발음하기도 수월한데?”라고 반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부를 때는 “말금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때 알았다. 한자어 淑은 水(물 수)와 叔(아재비 숙)이 결합한 형성자라는 것을. 또 국어사전은 ‘맑다’나 ‘깨끗하다’를 물이 아닌 ‘사람의 성품’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던 ‘물가 숙’은 맑다거나 깨끗하다, 착하다. 어질다. 얌전하다. 아름답다. 등등의 뜻을 품은 글자였다. 아버지가 들려줬던 물가는 없었다. 그냥 글자를 쉽게 익히라고 삼수 변(氵)을 물가로 풀어서 가르쳤나 보다 여겼다. 그러면서 작명은 정성이 반이라는데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기대가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 왜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습니까? 또는 뜻을 어찌 남들과 다르게 짚어 주셨습니까? 라고 물어볼 수 없는 상황이니 나 혼자 상상하고 짐작할밖에. 역사적으로 보면 외자 이름은 주로 왕가에서 사용했다. 고려 475년 34대 왕들이 그랬고, 조선 시대에는 태종 이방원과 단종 이홍위를 제외한 25대 임금 모두 한 글자 이름이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왕의 이름으로 쓰인 글자는 감히 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들의 이름을 홑 글자로 지어 백성들이 쓸 수 있는 글자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가 왕족을 염두에 두고 내 이름을 작명하였을까? 추측하다가 혼자 웃었다. 아니면 외자 이름이 희귀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여성의 이름 중에 가장 흔한 호칭 중 하나가 숙이지 않은가. 갑, 을, 병숙이, 일, 이, 삼숙이를 비롯한 세상의 온갖 숙이 봄 강변에 다북쑥처럼 우거졌다. 심지어 교실이나 사무실 등 같은 울타리 안에서 겹치는 이름도 많아 각기 다른 별호를 붙이기도 한다. 그러니 평범한 글자 2개를 합쳐서 쓰기보다 차라리 한 글자만 명명하지 않았을까. 발음이 딱딱했음에도 그리했음은 그 뜻을 좇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달리 담임선생님은 단순한 글자로 인생이 외로울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에는 일종의 자성예언 같은 것도 들어있으니까. 딱히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지만,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외자 이름은 외로움의 상징이었을 수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봄 동산의 풍경을 연상하며 멋모르고 지냈다가 자라면서는 남과 다르니 특별히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렇지만도 않았다. 선생님의 예언처럼 내 경우의 홑 글자 이름은 말 그대로 인생살이도 맑았다. 맑다고 곡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눈물 한 바가지의 구불구불 인생길이었지 싶다. ㄱ으로 끝나는 발음이 꼿꼿해 성격도 곧기만 했던가 보다. 왕족의 이름처럼 지었을지는 몰라도 한 글자 이름이 그다지 풍요롭지는 않았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경계할 지경이었다. 다행이었을지 희소성 면에서는 그런대로 숙이라는 한 글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50대 때였다. 중등학교 교감 업무를 맡았을 때부터였다. 같은 그룹 안에서 똑같은 이름을 만났다. 40대 중반의 장학사였다. 메신저 소그룹에 함께 속했다. 소속이나 간단한 소개글이 적혔음에도 몇 번인가 잘못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영전을 축하합니다. 승승장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든가 드물게는 통계자료 파일이 첨부되어 오기도 했다. 나에게 올 메시지도 상대방에게 갈 수 있겠다는 염려도 되었다. 소소한 것이라도 조심스럽게 말없이 전송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보낸 이가 안면 있는 사람이어서 메시지가 잘못 왔다고 살짝 귀띔하는 답글을 보냈다. 무심코 한 자기의 클릭에 무색해서 였는지 실수라고 여겨 자존심이 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메시지를 읽은 순간 그룹 명단에서 내 아이콘을 비활성화 처리하였다. 친절도 병이라고 조용히 넘겨버릴 것을 괜한 오지랖이었음이 씁쓸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근무지에 도장 새기는 사람이 찾아왔다. 요즘은 전자문서시스템 시대라 도장 찍을 일도 별로 없다. 인사치레 정도로 응수했는데 집요하리만치 스탬프 방식 도장을 추천하였다. 한 가지 제안까지 곁들였다. 이름의 글자 수가 적으니 어느 부분에 점 하나를 찍어주겠단다. 감쪽같이.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점이 글자 하나의 몫을 한다고. 안정되고 완전하며 운수대통할 것이라는 덕담은 맛깔난 고명이었다. 순간 얼굴에 점 하나 찍어 세상을 들끓게 했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어딘가에 점을 추가하면 ‘내 이름이 점숙이가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 묻다가 이 웃픈 해학에 슬그머니 동조하고 말았다. 주문했던 도장은 우편으로 보내왔다. 잉크를 머금고 있어서 누르기만 하면 선명하게 찍혔다. 인사 서류나 승진 서류에 그 도장을 활용했다. 서류를 제출하는 이들의 뜻한 바가 잘 이뤄지도록 주문을 걸었다. 덕분에 내게도 길한 의미가 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렇게 남이 모르는 비밀스러움도 간직했겠다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려 주민센터에 갔다가 일격에 거부당했다. 스탬프 방식 도장은 인감으로 등록할 수 없단다. 몰래 한 사랑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도장 속에 숨겨 놓았던 내 점숙은 지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며칠 전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에 갔다.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가끔 선운산에 가면 지장보살을 보고 온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데 난간에 출처 불명의 경구가 붙여져 있었다. “이름은 다만 이름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름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그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왕족의 이름처럼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 물가 숙으로, 선생님이 불러주었던 말금이로 또는 도장 파는 사람이 점지해 준 점숙으로 어쩌면 고독한 여정의 격랑을 노 저어 왔다. 남은 삶에서는 이름이 만들어 준 내가 아니라 시인 김춘수의 「꽃」에서 같이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으로 마음을 다해 만들어가리라.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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