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숙
전)중등학교 교장
창밖은 설국이다. 눈은 밤새 내려 쌓였고 낮에도 계속될 기세다. 아파트 테라스에서 마주보이는 참나무 숲은 연회색 눈안개로 자욱하다. 바람이 가끔 눈보라를 일으킨다. 흩어지는 눈비늘에 상상의 조각들을 실어본다. 북유럽의 어느 자작나무 숲이거나 얼어붙은 러시아의 호숫가를 떠돌다 그예 푸시킨의 「눈보라」 속으로 섞인다. 마랴 가브릴로브나의 눈썰매 마차에 다가간다. 나는 곧 그 운명의 마차에 동승하고자 한다. 마차는 마랴의 집 정원이 끝나는 길가에 대기 중이었다. 예비 신랑 블라지미르가 신부를 위해 보낸 삼두마차였다. 마부 테료슈카는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용감한 귀족 아가씨를 싣고 이웃 마을 교회까지 달릴 예정이었다. 그녀와 블라지미르의 혼인을 위해서.야반도주처럼 부모 곁을 떠나려는 마랴의 심정은 괴로웠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소파에 엎드려 울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프랑스 소설로 교육받았고 그 속의 환상을 꿈꾼 신여성이었지만 가난한 남자를 택한 자신의 미래가 두렵기도 했을 터였다. 푸시킨은 이런 심리적 갈등을 “정원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바람이 울부짖었으며 덧창이 흔들리며 덜컹”거림으로 묘사하였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위협으로, 불길한 전조”라고 암시하였다.가족이 잠든 시각 마랴와 하녀는 정원을 빠져나와 눈썰매 마차로 향했다. “바람은 마치 젊은 여자 죄인을 멈추게 하려는 듯” 여전히 불어닥쳤다. 그런데도 그녀는 출발해야 했고 말들은 눈보라 속을 나는 듯이 달렸다. “날씬하고 창백한 열일곱 살 아가씨”는 네나라도보 영주의 딸이었다. 신붓감으로 촉망받는 귀족 영애였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것은 군인 소위보였는데 말단퇴역 관리보다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하층민이었다. 마랴의 부모는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은밀히 만났다. 만날 수 없을 때는 편지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열정으로 끓어올라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세했다. “우리가 서로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다면” “잔혹한 부모의 뜻이 우리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자기들끼리 결혼할 것을 대담하게 결정했다.때는 1812년 초 어느 겨울밤이었다. 혼인 장소는 좌드리노 마을의 교회로 정했다. 예비 신랑은 사제를 만나 승낙받았고, 증인을 구했다. 마차와 마부를 보내 신부가 될 마랴를 태우고 오도록 당부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소위 보는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자신도 식장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남자는 눈보라 속에 길을 잃었다.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밤새 헤맸다. 얼마나 휘몰아치는 악천후였을지 짐작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던 신부는 탈진해서 기절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례를 맡은 사제도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때마침 사내 하나가 교회로 들어섰다. 문밖에서 서성대던 이들은 신랑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꾸물거린” 거냐면서 결혼식장으로 안내했다. 곧이어 늙은 사제가 예식을 진행했다. 촛불은 희미해서 얼굴이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혼인 서약이 끝나고 입을 맞추려던 순간 신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애타게 기다렸던 신랑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민이라는 기병대 대위였다. 자신의 연대가 있는 빌나로 가던 중 극심한 눈보라에 길을 잃었다. 불빛이 보이는 곳을 좇아 왔는데 바로 이곳 교회였다. 경황없는 중에 사람들에 이끌려 결혼식 소동에 임했지만, 현실을 깨달은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이야기는 1811년 말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쳐들어오기 전 해이다. 푸시킨은 이 전쟁을 소설의 배경 일부로 차입했다. 눈보라라는 악재로 결혼이 깨진 블라지미르를 보로지노 전투에 투입시켰는가 하면 모스크바에 프랑스 군대가 몰려오기 전날 밤에 전사시켰다.실제로 나폴레옹은 1812년 6월에 전쟁을 시작하며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리라 작정하였다. 프랑스 연합군의 전력은 막강했고 사기는 높았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뜻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특히 러시아에 의해 물자와 식량 보급로를 철저히 차단당했다. 청야전술의 초토화 퇴각 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예측하기 어려웠던 러시아의 자연환경 또한 지는 전쟁에 일조하였다. 싸움은 러시아가 이겼고 그들에게 1812년은 영원히 기억할 한 해가 되었다. 푸시킨도 이 영광을 작품 속에 각인하고 싶었을까? 가난한 소위 보를 전사자로 만들어 마랴에게 슬픔의 세월을 안겼지만, 승리의 벅찬 감정을 이렇게 환호했다. “잊을 수 없는 시기! 영광과 환희의 시기! 조국이라는 러시아인의 심장은 얼마나 강하게 뛰었는지! 재회의 눈물은 얼마나 달콤했는지! 얼마나 한마음이 되어 우리는 민족의 자존감과 황제에 대한 애정을 결합했었는지! 그리고 황제에게는 또 얼마나 멋진 순간이었던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건 러시아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딸자식이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하자 마랴의 부모는 가난한 소위 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해진 운명은 말을 타고도 돌아갈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가난은 악덕이 아니며 재산과 사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는 것이다.”라며 결혼을 승낙하였다. 하지만 소위 보는 그 승낙을 거절했다. 가난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던지 아니면 밤새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지쳐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랴와의 혼인을 파기한 후 보로지노 전쟁터로 떠났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블라지미르를 못 보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던 마랴는 슬픔과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사이 그녀의 아버지도 모든 재산을 딸에게 상속하고 사망했다. 하지만 재산조차도 그녀를 위로하지는 못했다. 다만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픔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마랴는 한 남자를 만났다. 전쟁에서 당한 부상을 치유 중인 영광스러운 군인 장교였다. 그들은 조금씩 속내를 펼쳐 보이며 가까워졌다. 과거의 기억까지도 고백하다가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눈보라가 치던 날 밤, 어쩌다 혼인을 서약했던 장본인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병대 대위였던 부르민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의 발아래 몸을 던졌다. 얼결에 혼인을 서약했고 입을 맞추려던 순간 놀라 도망쳤던 것을 떠올리며 신부에게 속죄라도 하듯이. 푸시킨이 쓰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운명이란 무엇이었을까? 마랴의 부모는 하층민 소위 보를 운명의 남자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그것이 필연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면 그녀와 소위 보의 사랑은 한순간 불어닥친 눈보라였을까. 전장에서 죽은 소위 보 블라지미르와의 애틋했던 사랑이 가슴 시렸지만 「눈보라」 속을 헤쳐나온 아리따운 아가씨 마랴 가브릴로브나와 브루민의 해피엔딩이 또 다른 여운을 남겼다. 창밖은 그대로 설국이고 시나몬 향기 그윽한 차 한 잔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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