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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람 사는 이야기, 『土地』의 터전에서(2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11월 19일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한편 2세대들인 이홍(이용의 아들)과 최환국, 윤국(서희와 길상의 아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5부에서는 2차 세계대전 중의 한국인들의 고난과 기다림을 다뤘다. 소설은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 소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성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 소설은 민족사의 저변 위에 모계 중심으로 가문을 일구어낸 불굴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또 최서희와 길상이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형상을 연출한다. 마치 다면체 거울로 보는 것과 같다. 윤 씨 부인을 비춰보면 범접하기 어려운 강단 뒤에 김환(구천)을 둘러싼 남모르는 인간적 고뇌가 절절하다. 최서희를 거울에 비추면 어머니의 사랑 대신 할머니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어린 소녀가 장성하여 최참판댁의 살림살이를 지켜내는 의지가 가상하다. 이용 일가를 거울에 들이대면 어떤가. 그악스럽기 짝이 없는 강청댁, 욕심쟁이 임이네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 사이에서 억눌린 용이 아재와 월선의 여한이 없는 사랑은 어쩌란 말인가. 순진무구했던 기화(봉순)를 비추면 그녀의 삶이, 김평산을 비추면 김평산의 꼬인 인생이, 심지어 미친 여자 또출네의 이야기에서 동식물의 등장까지 조연이지만 모두가 탄탄한 캐릭터의 주인공이 된다. 악인 역시도 미워할 수 없는 내 피붙이처럼 끈끈하게 다가온다. 척박한 세상을 향한 몸부림이어서 가상하고, 치열한 삶에 섣부르게 굴하지 않아 존중과 감동을 준다. 이 소설을 통해 우주의 섭리를 다 각도로 체험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동학 접주 김개주와 윤 씨 부인, 그들의 아들 김환(구천)과 별당 아씨의 인연이다. 실제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운명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1부에서 가문이 몰락했을 때 나는 거기서 소설이 싱겁게 끝나는가 싶었다. 회생 불능이구나 절망했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했는데 윤 씨 부인이 서희를 불러 3층 장의 받침으로 받쳐놓은 금괴를 빼내어 줄 때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가의 지략이 소용돌이치는 물보라처럼 아찔했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고 한스럽고 아쉬운 것은 용이 아재와 월선의 사랑이다. 최서희와 함께 평사리에서 만주 용정까지 질기고도 길긴 인연의 끝이 여한이 없는 사랑이라니…. 세상에 어떤 사랑이 이다지도 아플까. 이런 사랑을 끌어낸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 몸이 찹제?”/ “아니오.”/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박경리, 『토지』, 8권 중에서)
최참판댁 마당 아래 매실밭에는 청매실이 울툭불툭 자라고 있었다. 시고 떫은맛이 떠올라 저절로 침이 고였다. 돌담마다 흐드러진 마삭줄은 바람개비 모양의 하얀 꽃잎들로 덮여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최서희가 노닐었던 연못가에는 감꽃이 눈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감나무 아래에는 한 노파가 풀을 매고 있었다. 월선네의 환생을 보는 것 같았다. 가뭄 탓인지 호미 끝이 튕겨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때 “뎅, 뎅” 종소리가 울려 맥놀이로 번져왔다. “금성사 저녁 공양 소린기라.” 풀 매던 노파가 혼잣말처럼 뇌였다. 온종일 말벗이 없어 심심했던 심사가 묻어 있었다. 저녁 공양이라는 말에 살짝 시장기가 느껴졌다. 어서 돌아보고 내려가 잔치국수집에라도 들러야겠다며 발길을 돌려 안채를 돌아 나오다가 외양간을 만났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있었다. 정겨워서 확 빠져들었다. 조금 있으니 “으음무우우” 하고 우는 것이 아닌가? 그다음엔 워낭 소리가 “쟁그랑, 쟁그랑” 울렸다. ‘사람도 살지 않은 이 집에 누가 소를 돌보나?’ 하고 자세히 보니 잘 만들어서 세워 놓은 모조품 소였다. 왈칵 속았다는 실망감이 솟구쳤으나 어차피 소설이 허구이고 이 집이 드라마를 찍기 위한 가상의 공간인데 소가 모조인들 뒤늦게 서운할 일도 아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긴 강으로 굽이쳐 대해로 흐르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터전을 둘러보고 내가 읽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느낌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보았다. 최참판댁을 벗어나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월선네 주막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소설 속의 용이 아재와 월선의 아린 사랑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내 마음이 이리도 아린데 그 둘의 사랑에는 정말 여한이 없었을까. 주막집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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