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삶이 그대를 속이면(2)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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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알렉산드르 1세가 남러시아 따간로그에서 죽자 니콜라이 대공이 후계자가 되었다. 푸쉰은 푸시킨에게 페테르부르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혁명의 도래를 예감하였던지 푸시킨은 길을 떠났다. 도중에 산토끼가 세 번이나 나타나 앞길을 막았는데 좋지 않은 징조라 여겨 가던 길을 멈췄다. 만약 친구의 권유에 따랐다면 반란의 주모자인 시인 릴레예프 집으로 직행하여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미 추방된 자가 황제의 명령 없이 움직였기에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14일 푸시킨의 친구, 동창,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였다. 프랑스 점령을 참가했던 장교들이 분연히 들고 일어선 세상 유례없는 혁명이었다. 그들은 3천 명의 사병과 장교로 도열, 황제에게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농노를 해방하고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라고 주장했다. 법 앞의 평등과 입헌군주제 또는 공화제 등을 용감하게 외쳤다. 그날은 바로 니콜라이 1세의 선서식 날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다. 황제 암살 담당자는 종교적 신념으로 변심하여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탄압 군대는 9천 명이었다. 군대의 충성서약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혁명은 반란에 그치고 말았다. 릴레예프를 비롯한 5명이 처형되었고 120여 명의 유형이 잇따랐다. 푸쉰은 20년 강제 노역형을 받았다. 니콜라이 1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황제다.”라며 반란을 피로 진압했다. 푸시킨은 황제에게 끈질기게 접견을 요청하여 친구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데카브리스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현장에 있었다면 가담했을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 솔직함에 푸시킨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시인이라고 추켜 주었다. 관용으로 포장한 독재자의 노련함이었다. 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릴레예프의 아내에게 금일봉도 주었다. 푸시킨에게는 거주와 창작의 자유를 허락하되 차르가 직접 검열하고 감시하였다. ‘교육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명령했는데 이것은 ‘반골 시인이 황제에게 봉사한다.’라는 어용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였다. 푸시킨이 데카브리스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분명했고 살아있는 혁명의 화신이라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옥죔 속에서도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실패 원인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캅카스로 유형 당한 동지들을 찾아 허가 없이 훌쩍 떠나 답을 찾아 헤맸다. 결론으로 데카브리스트들은 수동적인 군중을 영웅이 지도해서 역사를 가속화 해야 한다고 했는데, 푸시킨은 “영웅들이여,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고 했으며 역사적인 합법칙성을 인식해서 민중과 보폭을 맞출 것을 주장했다. 임헌영은 삶이 그대를 속이면 “차라리 푸시킨처럼 쓸개즙을 핥은 듯이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 서른여덟 살의 생애 중 절반은 감시와 탄압 속에서 오쟁이 진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쓸개즙을 핥듯 살았던 푸시킨! 혁명을 외친 시 「자유」를 발표한 후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으려 날마다 쓸개즙을 마셨을 것 같다. 그러면서 그가 꿈꾼 역사를 왕성한 창작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정수로 승화시켰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집필했고 모두 성공작이었다. 아름다운 문체는 성서처럼 러시아어 학습 교재로 삼을 정도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을 넘어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를 비롯한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음악가가 오페라와 발레로 창작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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