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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상소문-배은율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 얼마 전 흙속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 있다 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흙이 밀어올린 나무나 풀들은 보이는 붓이지만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붓도 있다 그러나 보이는 붓보다 보이지 않는 붓의 힘이 더 세다
오래 전에 흙은 붓을 들어 낯빛이 다른 계절들이 서로의 낯빛을 훔쳐 달아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글은 기상이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럴 때 붓은 투박한 땅의 문체로 겁 없이 흙의 상소문을 쓴다
이따금 꽃가지들마다 이슬이 옮겨 앉는 일, 톡톡 터지는 이슬방울에 볼과 볼을 서로 맞대느라 바람이 물빛 아침을 잊곤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땅은 붓을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붓은 새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 바위 틈 살꽃들의 신음소리처럼 섬세하게 글을 쓴다 하루를 건너온 빛바랜 기억들이 제 생각의 부피를 키우는 동안, 땅은 붓을 들어 날마다 흙의 상소문을 올린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곳은 바람이 오가는 허공이다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 그래서 붓은 늘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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