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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
전)중등학교장
한때 백제의 도읍지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부여.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는 그의 기행문에 ‘눈을 들어 쳐다볼 산이 없다. 그게 부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덕분에 넓고 높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부여는 하늘이 가장 큰 동네라고도 했다.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잠들어 있다. 지난해 9월 16일, 그의 숨결과 흔적을 찾아 부여를 방문하였다. 생가와 문학관에 들러 신동엽의 삶과 문학을 보고 듣고 느껴보았다. 어느 수풀 속에서 들릴 법한 늘메기 울음소리를 상상하면서.
이야기하는 쟁기꾼, 신동엽
신동엽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석림石林이다. 생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69번지. 이야기하는 쟁기꾼, 신동엽의 대지가 펼쳐진 곳이다. 그는 1930년 8월 18일, 아버지 신연순申淵淳과 어머니 김영희金英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소학교에 입학했는데 몸이 허약했고 키도 큰 편은 아니었다. 성적이 매우 우수했으며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는 우등상장과 상품을 받았다. 상품은 금전출납부였는데 어린 학생에게 수여한 품목으로는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재미있는 점은 동엽이 그 출납부에 금전이 들고 난 내용을 적은 게 아니라 시를 습작한 노트로 활용하였다. 그 흔적은 잘 보관된 여러 권의 습작 노트와 함께 문학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1945년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사범학교 시절에 동엽은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를 읽었고, 시인 신석정을 만났다. 김소월, 정지용, 엘리엇 시집을 애독했다. 투르게네프 산문집을 비롯한 문학전집을 즐겼고, 크로포트킨의 영향으로 아나키즘 경향이 짙어졌다. 4학년 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한국 역사에 관심이 있어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6·25전쟁으로 인해 전시연합대학에서 수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나이 스무 살(1950년) 12월에 국민방위군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죽을 만큼 고생하다가 이듬해 2월 중순, 국민방위군 대구수용소를 빠져나왔다. 부여까지 오는 동안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낙동강 어디쯤에서 날 게를 시식했다. 이 게에서 디스토마가 감염되었다고 하는데 훗날 세상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친구가 차린 헌책방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인병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부여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면서 평생 반려자가 되었고 슬하에는 1녀 2남이 있다. 신 시인은 1961년부터 명성여자고등학교 야간부 국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취직 과정의 일화가 인상적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성격은 매우 정직했고 농담도 별로 하지 않았다. 취직을 위해 서류를 접수하면서 별다른 의사 표현 없이 이력서와 함께 자기 시를 넣고 나왔다고 한다. 나를 쓰려면 쓰라. 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었다는데 그 정직함과 진정성을 알아본 학교 관계자가 특채했다고 한다. 시인의 생애를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1960년 4월 혁명을 겪고서야 그도 서력西曆의 시간들을 산다. 생사를 넘는 전란 속에서 언제 대학에 다니고 언제 연애를 했는지. 제2공화국의 춘궁기와 절대빈곤 속에서 어떻게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하지만 간암에 지쳐 숨지기까지 한 번도 모국어의 세계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인생도 문학도 무르익는 나이 만 39세. 11년 동안의 시인 생활이 슬프게 막을 내렸다. - 신동엽 문학관을 가꾸는 사람들, 『신동엽』, 「생애」 중에서, 35쪽
시인은 갔지만 그를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생가와 문학관이 조성되었는데 많은 부분 박물관 전문가인 부인의 뜻에 따라 완성되었다. 문학관 안팎을 돌아보면 건립에 함께 한 이들의 뜻 또한 잘 반영되었음을 공감할 수 있다. 언제든지 그곳에 가면 신동엽 시인을 만나 그의 삶과 문학을 접할 수 있게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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