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역사의 부침(浮沈)을 극복하고 굳세게 일어선 사실을 추앙하는 학계의 움직임은 국민의 자랑거리다. 대부분의 국민은 역사 연구자의 전문적인 의견 발표를 그대로 믿고 따른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과거의 사실을 전문 지식도 없이 가타부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의심없이 넘어간다. 이 맹점을 이용한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기록과 사실관계를 왜곡하여 역사적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를 잘 모르는 지자체에서 그대로 수용하여 자기 지역의 큰 명예로 둔갑시키는 거짓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의친왕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서 높이 평가해 왔다. 그는 고종의 둘째 아들로 첫째 영친왕과 달리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하였다는 공로는 문자 그대로 행동하는 왕족의 표본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가장 앞장선 사람은 이준 황손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이다. 그는 2024년6월 세종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의친왕이 1909년 경남 거창군 정태균과 함께 40일간 머무르며 의병을 양성하다가 일본군에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주장했다.
의친왕의 일거수일투족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모두 게재되는데 1909년 1년치를 모두 조사해 봐도 서울에서 벗어난 일이 없는데 무슨 거창 의병이란 말인가. 더구나 의친왕과 의병을 양성했다는 정태균은 의병 토벌대에게 자택을 제공하고 군량미를 대줬던 친일파였다. 의친왕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친일파 척결에 나섰다는 주장은 독립운동가인 이강(李剛)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의친왕의 본명이 이강인 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로 이름 세탁을 했다. 의친왕은 李堈으로 한자가 다르다. 李剛선생(1878~1964)은 공립신보 주필, 해조신문, 대동공보를 발행하며 안중근 사건에도 관여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분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이영주는 의친왕이 ‘제국익문사’라는 항일조직을 지휘했는데 그 재무 담당이 내장원경을 지낸 김재식이라고 주장한다. 세종시는 이를 근거로 그의 고택을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세종시장 최민호는 학술대회 개회사에서 강조하고 있다. 김재식의 문집 송암집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는 고종 정부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번도 벼슬길에 나간 일이 없다. 그런데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은 김재식이 내장원경에 임명된 1905년 관리재산이 최대규모가 되었다면서 의친왕 이강과 송암 김재식의 유대관계를 강조한다. 그 후 김재식이 외무아문 대신에 임명되었다면서 함께 임명된 김가진과 어윤중의 이름만은 한글로 썼다. 그러나 고종실록에는 외무아문 대신이 김윤식(金允植)임을 밝히고 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태진이 김재식으로 표기한 것은 왜 그랬을까.
이 기사는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가 모두 실명으로 밝혀 책임을 확인한다. 의친왕의 독립운동 관련 행동 중에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신의주까지 갔다가 일본군에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는데 이 기사에서는 언급이 없다. 그가 독립운동을 실제로 했다고 알았던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폭로기사지만 유명학자가 역사왜곡에 앞장설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정읍에서 봉기했던 동학혁명의 역사도 왜곡되고 있다는 고부출신 김정일 역사연구가의 주장도 문제의 심각성이 의친왕 못지 않다. 전봉준이 고부에서 人乃天과 輔國安民을 내걸고 민병을 일으켜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여세로 삼남지방을 휩쓴 사실은 역사의 기록이다. 전라도의 수부 전주를 함락하여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이에 놀란 조정이 전라감사를 시켜 동학군과 전주협약을 체결하고 고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하여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척결한 것은 혁명의 최고 목표 달성이었다. 이 과정에서 호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영남의 모든 지역에서도 동학군은 위세를 떨친다. 고부에서 시작한 농민 궐기는 이웃 고창 무장에서도 일어났고 남원까지 번졌다. 이 때 전봉준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장군은 손화중 김개남등으로 나중에 모두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신순철)은 고부 기포를 가볍게 처리하고 동학군의 경유지인 무장을 포고문 발표지역으로 둔갑시켰다. 이는 고부와 무장의 동학혁명 발상지 경쟁처럼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고 고부를 무장으로 뒤바꾸는 역사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순철은 2023년 ‘고창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1960년대 5.16군사정권이 동학군 첫 번 째 전승지인 고부 황토현에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운 사실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 동학혁명으로 바꿨다”고 폄하하여 고부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고창을 내세운다. 이에 호응하여 막대한 혈세를 퍼붇는 지자체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역사를 비뚤어 해석하는 학자와 지자체가 존재하는 한 올바른 역사가 설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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