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자전적 에세이>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16일
교룡산성57. 30년 전 나의 어머니
30년 전, 그러니까 1975년 1월 나는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다. 부부교사로 결혼한 지 2년째가 된 이 무렵 아마 우린 첫 아이 소라의 돌잔치 준비에 들떠 있었을 것이다. 적막하던 집안에 오랜만에 아이가 태어나자 집안에 활기가 돋기 시작했다.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방안에 빙 둘러 앉아 그 귀엽게 아장거리는 모습에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일찍이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 가시느라 고생이 많았다. 명당(明堂) 찾기에 여념이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산(山)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중병(重病)을 얻어 식물인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가장(家長)의 병구완을 위해 재산을 탕진하였기 때문이다. 여덟 명 식솔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몇 마지기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의식을 잃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남편 간호와 4남매를 기르고 교육시키느라 젊은 날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외로운 전투 그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난 비교적 학비가 싸고 취업이 용이한 교육대학을 택하여 그 바램대로 19살의 나이에 교편을 잡게 되었다. 교통이 불편한 때인지라, 첫 월급을 타 어머니께 빨리 갖다드리고자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수를 가로질러 달렸다. 5월이었는데도 냇물이 허벅지까지 올라 와 바지를 벗어 머리에 이고 내를 건너 10km가 족히 되는 논밭 산길을 달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집에 도착하여 첫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이렇게 많은 돈을 네가 벌었냐!’하시며 무척 대견해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집안의 살림이 이때부터 차츰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딸아이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어머니에게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치의 여유도 없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무렵 꽃봉오리 같은 손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어머니는 유난히도 손녀 소라를 예뻐하셨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내가 근무하는 용성초등학교(남원시)까지 아이를 업고가 젖을 먹여 오시곤 하였다. 아이를 업고 동네방네를 돌아다니시며 자랑 아닌 자랑도 하고 다니셨다. 그 일로 때로는 핀잔도 받았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녀 재롱을 자랑 삼아 늘어놓고 다니신 결과 지금도 고향엘 가면 ‘그 소라 지금도 잘 있느냐’고 나보다 그 애 소식을 먼저 묻곤 한다. 그 애가 벌써 자라 지금 서울에서 국어 선생 노릇을 하면서 그 당시 자기만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으니 참 빠른 게 세월이다.
당신이 힘겹게 살아오셔서 그런지 어려운 환경에 처한 분들과의 인생 상담을 즐겨 하시며 어려웠던 시절 당신의 체험담으로 그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곤 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시어 뵐 수 없는 어머니이시지만 생시에 고향엘 한 번씩 내려갔다 오시면 보따리 보따리마다 갖가지 농산물을 싸가지고 오셨다. 무슨 전리품처럼 그것들을 내 앞에 하나하나 꺼내놓고 ‘이 오이는 ○○네 엄마가, 이 가지는 ○○댁이, 이 호박은 ○○당숙모가 너 갖다 주라고 주신 거란다.’하시며 기뻐 하셨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을 어른들로부터도, 면장님으로부터도, 아니 각급 학교와 군수님으로부터도 ‘훌륭한 어머니’상을 여러 차례 받으셨던 어머니. 대범한 성품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며 순리와 온정으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며 항시 자기보다는 남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지금도 내 책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김동수, ‘30년 전 나의 어머니’, 『한국문인』 3·4월호, 2005년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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