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겨냈던 6.25전쟁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23일
국가보훈부 전북서부보훈지청 주무관 신 여 은 호국보훈의 달은 매년 6월에 지정된 특별한 달로,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이들의 공훈을 기리고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깊은 달을 맞아 낯선 이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그들은 바로 75년 전, 자유를 위협받던 대한민국을 함께 지킨 국외 참전용사들의 후손이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남북 간의 냉전은 더욱 고조되었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무력으로 남한을 침략함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부터 북한은 소련,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장비와 인력지원을 받았으며,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한 한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발 빠르게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950년 7월 4일 미국의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했다. 미국에 이어 영국은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여 임진강 일대의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 싸웠다. 그 외에 호주, 캐나다, 터기 등 총 16개국이 위기에 처한 한반도를 돕기 위해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유엔헌장에 명시된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대의에 따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국가들도 있다. 덴마크 정부는 유엔 회원국 중에서 제일 먼저 지원 의사를 밝혔으며, 스웨덴은 중립국이었으나 1950년 9월부터 1957년 4월 철수할 때까지 6.25전쟁에 파견된 의료지원부대 중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많은 중환자를 치료했다. 의료지원 외에도 멕시코, 오스트리아 등 많은 국가와 국제기구들이 한국에 물자를 지원하였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고 서울을 함락했으며 이로 인해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났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75,000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된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었다.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적의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합세했던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다시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과 유엔 참전으로 맺어진 인연을 미래세대로 계승하기 위한 ‘유엔참전국 후손 교류캠프’를 진행하였다. 이번 캠프에서는 국내외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 45명을 포함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후손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후손도 함께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 난민이 발생하였고 현재까지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다. 6.25전쟁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 피해는 우리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젊은 날을 희생했던 우리 군과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피를 흘렸던 16개국의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군인들과 함께 이겨냈던 그날처럼,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미움과 혐오를 버리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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