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자전적 에세이> 교룡산성61. 소라와‘여성의 창(窓)’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7월 14일
교룡산성61. 소라와‘여성의 창(窓)’
1995년 12월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장녀 소라(이화여대 국문학과 3학년 재학 중)와 함께 도착하여 UC 버클리가 있는 알바니(Albany) 게이트뷰(Gateview) 아파트에서 1년을 함께 지냈다. 나는 당시 한국학 고서가 제일 많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U.C.Berkely 동아시아 도서관과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을 중심으로 주로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항일 문학 자료’들을 수집하러 갔고, 장녀 소라는 나를 따라 어학연수와 그곳의 문학 수업을 청강하러 나와 동행하게 되었다. 근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국일보 손수락 편집국장의 권유로 소라가 그 신문 ‘교포사회’란에 마련 된 ‘여성의 창(窓)’에 필진으로 참여하여 매주 1회씩 6개월 간 ‘한국 여대생이 바라 본 미국 사회’에 대한 인상을 발표하여 교포들로부터 고국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는 호평을 받으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중 세 편을 소개한다.
우리 할머니 오늘 아침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6월말쯤 미국에 오신다고. 그렇지 않아도 작년 말 작별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와 마음에 늘 걸렸었는데··· 며칠 전 신문에서 이혜리 씨가 자기 외할머니의 인생 역전을 그린 「Still life With Rice」란 책을 소개했었다. 그 때 작가와 외할머니의 모습도 함께 실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답고 부러운 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새 우리 할머니(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를 꼭 ‘우리 할머니’라고 불렀었다.)가 사진 속으로 들어와 나를 보고 웃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내 새끼 밥은 잘 먹고 있냐? 어린 게 이국땅에서 아빠 모시고 공부하느라고 고생이구나’라며 금시라도 그 두툼하고 인정 많은 손을 뻗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그 사진을 끌어안고 “할머니”하며 펑펑 운적이 있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 할머니가 소중하지 않으랴만은 내게 할머니는 부모님 못지않은 의미를 지니신 분이다. 부모님이 모두 직장생활을 하셨기에 나는 거의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갓난아기였을 때는 엄마 젖을 먹이기 위해 엄마 직장으로 점심시간마다 나를 업고 가셨고, 내가 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는 방과후 엄마 대신 나를 기다려 주셨다. 다른 형제보다 제몫 찾아 먹기에 둔한 나를 위해 늘 여분의 먹을 것을 찬장에 숨겨 놓으셨고 어쩌다 시골 남원 잔치 집에 다녀오신 날에는 술이 얼큰해진 모습으로 고이고이 손수건에 싸놓으셨던 곶감이며 타래과를 동생들 눈치 채기 전에 어서 먹으라며 내놓으시곤 하셨다. 하루 내내 가방 속에서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제 맛을 잃은 지 이미 오래 건만 이 세상 어느 값비싼 음식에 비교하리. 이런 날에는 자리에 들어 수십 번도 더 들은 당신의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내가 18살 때 시집왔는데 몇 년 안 되어 네 할아버지가 중병에 들어··· ” 그 후 혼자 사시면서 4남매를 힘들게 키우신 애기, 나중에는 할머니도 우시고 끝내 어린 나까지 울어버리게 했던 할머니의 얘기를..., 그러다가 술 냄새에 코까지 심하게 고시며 주무시면 그래도 나는 그 할머니 품이 그리도 따뜻하고 편해 자꾸만 자꾸만 파고 들어었건만. 그 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어 할머니 품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전주 집으로 내려오는 날이면 늘 줄게 없으시다며 안타까와 하시던 할머니의 그 깊고도 끝이 없는 사랑에 나는 언제나 얼마큼이나 보답하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 난생 처음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이 보잘 것 없는 글이나마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께 바친다. 내 첫 월급으로 이쁜 속옷과 약주 한 잔 올릴 때까지 부디부디 건강하시기를.
49 그리고 22 낯설움과 설레임으로 Bay Bridge를 건너온 지도 어느덧 넉 달이 지나고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의 순리에 따라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는 점들이 이직도 몇 있으니 그것은 갑작스런 22살과 49살의 한 집살이이다. 그와 나는 5년을 따로 살다가 작년 12월 28일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다시 동거인이 되었다. 그 전에도 17년간 같이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때 나는 많은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또 그의 넓은 그늘 아래에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미성년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자기의 주장을 가진 성인으로서 이 집안을 함께 이끌어가야 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껏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내 마음껏 살아왔던 그와의 공생에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생활습관과 가치관의 차이가 컸다. 나는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대충주의자이며 끼니를 잘 안 챙겨 먹으며 아침 잠이 많은 반면 49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식사를 중시하며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제 구실을 한다’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자이다. 다음은 갑작스런 환경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다. 밥도 제대로 못하던 내가 이곳에 와서는 유달리 식성마저 까다로운 49의 식사에서부터 때로는 새로 사들여온 가전제품의 조작과 수리 그리고 그의 고달픈 비서 역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들을 앞장서 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이러한 일들이 너무 당혹스럽고 힘이 들어 이런 일들을 나에게 맡긴 그에게 때때로 짜증과 불평을 털어 놓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부딪힘과 깨짐 속에서 우린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한 발씩 다가가고 있었다. 늘 우리 위에서 매사를 좌지우지하며 군림했던 한 집안의 바위 같은 가장은 아니고 이제는 생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하는 동지의 관계로서 우리의 역할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지부동으로만 알았던 그의 바위에 요즈음 하나, 둘씩 금이 가고 있음을 이곳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 밑둥치로 뿌리내린 묘목들을 곱게 키워내느라 그간 온갖 세풍에 닳고 시달려 왔음인지? 그런데도 49는 22의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오늘을 사신다. 그러기에 어린 나를 부쩍 안아 목마를 태워주셨던 32시절의 그보다 50이 다된 오늘의 그를 더욱 자랑스러워하고 있음을 알고 계실는지? 옆방에서 인기척이 난다. “소라야, 와서 어깨를 좀 밟아줄래?”, “네, 아빠”, “비가 올랑갑다...” (1996.5.16.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에 실린 <49 그리고 22>)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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