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기술자의 죽음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3월 30일
전대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유사 이래 고문은 있어 왔다. 집단이 형성되는 시기부터 계급이 생겨났고 계급의 위아래가 정해지면서 상급자는 하급자를 종처럼 부려먹기 시작한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보좌관을 들볶았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 사법처리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며 지금도 수사를 받거나 재판에 계류되어 있다.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조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민관(民官)을 불문하고 갑질을 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권의 중요성은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누구보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림들이 위상이 달라지는 순간부터 표변하여 아랫사람 다루기를 종처럼 여기는 풍조는 개인의 인격 탓이기도 하지만 사회 풍조가 그것을 용납할 만큼 부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수사기관에 붙들여 간 사람에 대한 수사관들의 태도는 단순한 갑질을 넘는 수가 많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모든 허물을 다 벗어야 한다. 나는 일제 시대에 태어났지만 광복후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독립군 고문에 대해서는 말과 글로만 배웠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 5.16군사 쿠데타를 맞이하면서 이른바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직접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 전에 전북대 3학년 때 4월4일 대학생 데모를 맨 처음 했을 때 전주경찰서 사찰과에 끌려가 형사들이 보여주는 고문도구를 눈으로 보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한 형사들의 엄포였을 뿐 직접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 생긴 중정은 달랐다. 우선 몽둥이 찜질부터 한 다음 신문(訊問)을 시작했다. 36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을지를 몸으로 느껴야 했다. 이런 고문은 박정희정권이 점점 악랄해지면서 민주화운동은 온통 고문에 의한 투옥과 고통으로 얼룩졌으며 시름시름 앓다가 병신이 되거나 죽어야 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중정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모든 언론기관까지 파견관이라는 이름으로 편집국장 옆에 아예 좌석까지 차지하는 기막힌 행태가 계속되었다. 내가 대변인을 맡고 있던 민주통일당(총재 양일동)은 장준하 최고위원이 앞장선 유신개헌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관하면서 연인원 300여 명이 연행되거나 투옥되었다. 나는 당의 기관지 민주통일당보 편집장을 맡아 함석헌 김재준 윤보선 장준하 법정스님 등의 기고문을 게재했다가 호된 시련을 당했다.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인쇄소를 급습한 중정요원들은 이미 짜여진 신문 활자를 쇠톱으로 박박 긁어냈다. 다른 원고로 대체할 수 없는 만행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시꺼멓게 인쇄된 신문이 얼마나 언론자유를 말살하는 저들의 흉기였는지를 독자들이 스스로 알 기회로 활용하기로 하여 그대로 인쇄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일이 신문 발행될 때마다 계속되었고 나는 “긴급조치가 오래가면 긴급조치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중정에서 인쇄소를 다녀간 다음 다시 편집하여 게재했다가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했다. 이때 고문의 참맛을 봤지만 형기를 마치고 나온 다음 1년도 채 되기 전 10.26사태가 터지며 민주의 새날이 밝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며 모진 고통은 재연(再演)된다. 소위 5.18의 만행은 광주를 휩쓸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5.18 전야에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정치인은 중정, 학생들은 경찰, 언론인은 보안사 등으로 치밀한 계획 하에 사전에 연행했다. 첫날 밤부터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밤을 새웠다. 나한테는 다섯 명의 조사관이 한 방에서 감시하며 돌아가며 고문을 자행했다. 김대중 한테서 돈을 받아 학생들에게 데모자금으로 전달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것인데 처음에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역정을 기록하라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고문을 이겨내기 위해서 반항의 몸짓을 취했다가 더 큰 경을 치르기도 했다. 고문 기술자가 따로 없다. 자기들도 스트레스를 받는지 무슨 약을 수시로 먹었다. 그들은 계속 자백을 거부하면 기술자를 부르겠다는 위협도 가했다. 그때 이근안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근안은 경찰이면서 고문기술자로 성가가 높았는지 중정이나 보안사에서도 초빙했다는 얘기다. 다행히 그를 만나진 않았다. 그가 김근태 고문자로 알려지면서 명성(?)이 높아졌고 민주화가 이룩되며 구속되어 감옥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보면서 ‘사필귀정’이로구나 생각했지만 측은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 뒤 그가 석방후 목사로 변신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남은 인생이나마 반성하며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은 없지 않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사망했다는 부음을 전한 신문에 목사로 임명된 이근안이 “나는 애국자”라고 자기의 고문기술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변명했다가 교단에서 방출했다는 보도를 봤다. 회개하며 잘못을 뉘우쳐 많은 이들의 동정 받을 수 있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변명에 나선 그는 자기 근본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었을까. 인생의 허무함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삶이어야 했을까.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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