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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을 디자인하다(1-10)] 새콤달콤한 품앗이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1월 24일
목욕 바구니를 정리했다. 가끔 대중탕에 갈 때 들고 다녔던 바구니로 낡고 빛이 바랬다. 욕실 선반에 얹혀 졸고 있은 지 2년이 넘었다. 이제나저제나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잠을 깨우고 숨을 틔워주리라 했는데 그날이 언제일지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먼지라도 털어내고 내용물을 확인하려 살펴보다가 거꾸로 세워진 조그만 플라스틱 빈 병을 발견했다. 분리 수거통에 휙 던져넣으려다가 불현듯 이 용기를 손에 쥐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 멈추었다.
맵싸한 겨울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만사 제치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 긴장된 심신을 위로하는데 어떤 특효약이나 명약보다 신통했다. 샤워를 마치고 냉온욕을 하려 머리에 수건을 감싸는 중이었다. 등 뒤 어디선가 “저, 젊은 양반!”하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로 젊은 양반 기준을 이미 초과 달성했다고 여겼으므로 선뜻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양반, 나랑 등 밀지 않으실라우?”라는 말이 다시 귓가를 스쳤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도 진중하게 제안한 사람은 칠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뽀얀 속살의 여인이었다. 그이가 젊은 양반이라고 부른 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를 가리켰음이었다. 알아차린 순간 이 제안이 참 반가웠다. 요즘은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오히려 자존감은 낮아지고 친밀함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등을 같이 밀자고 하기에 참으로 조심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임에도 세신사에게 부탁하거나 혼자 허우적대고 말지, 서로 돕자 선뜻 입을 떼지 않는다. 불편한 내면을 드러내는 데 서툴고 옛날 풍습 따위는 잊고 있었는데 함께하자는 그 말이 등을 닦기도 전에 청량감을 주었다.
한 가지 난감한 문제는 내가 등을 밀기까지는 적어도 30분 이상 1시간 후의 일이었다. 몇 번인가 냉·온탕을 번갈아 들락거리고 고온 사우나를 두어 번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런 다음 상호작용이 가능할 텐데 그때까지 남아 있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였다. “저는 이제 막 왔는걸요. 등을 닦으려면 1시간은 있어야 해요.”라고 말하자 “내가 기다릴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속내로는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제안할 때까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망설였거나 같이할 사람을 물색했을 텐데 그 마음을 헤아려보니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럼 먼저 도와 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등을 밀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게요.” 자그마한 체구에 상냥한 이미지의 여인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나는 도움을 못 받아도 도울 수 있어서 흔쾌했다. 세신이 끝난 후 극구 기다린다는 걸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다.
그 후 나는 온탕에 침잠하였다가 반신욕으로 바꿨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마음은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에 가 있었다. 일손이 부족할 때 이웃끼리 주고받던 품앗이 풍속이 떠올랐다. 농번기에나 애경사 때 상부상조의 미덕이었는데 세상의 변화에 따라 풍속도 변했다. ‘상생(Win-Win)’이라거나 ‘Give and Take’, 아니면 제 몫은 제가 계산하는 더치페이가 유행이다. 세련되고 깔끔한 셈법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고 인정스럽지는 않다.
품앗이는 주로 봄철 모내기와 김매기, 여름의 보리타작, 가을엔 벼 베기와 타작하기 등에서 이뤄졌다. 모내기할 때는 새벽에 일찌거니 못자리 논에 가서 모를 쪘다. 그러면 논 주인집은 아침밥부터 내었다. 새참과 점심밥도 준비했다. 호랑이콩을 섞은 쌀밥에 머위들깨탕이 그득하게 담아졌다. 밥상 대신 광주리를 엎어놓고 상을 차려 애·어른 할 것 없이 그때나마 배불리 먹고 일했던 시절이었다. 못줄을 잡던 아재비가 “어이!”라고 힘차게 외치면 반대편에서 “어이!”라고 힘을 실어 화답하던 소리가 풍년가처럼 하늘가에 퍼졌다. 모잽이는 그 순간 잠시 허리를 폈다가 다시 모를 꽂았다.
연둣빛 나뭇잎들이 일렁거리고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은 밥때를 기다리며 도랑물 속에서 가재를 잡았다. 들판 경계 어디쯤에서 피어났던 달큰한 찔레 향기가 기억 속에서 날아와 온탕 수증기에 얹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가을에 벼를 벨 때도 품앗이는 이루어졌다. 낟알 한 톨도 허실 되지 않게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학생 봉사활동에 보리 베는 일은 부탁해도 벼 베는 일은 절대 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른들은 벼를 베고 아이들은 논 주위에서 뛰어놀거나 메뚜기를 잡았다.
봄날 모내기 밥상에 머위탕이 있었다면 가을 벼 베기 들판에는 갈치조림이 있었다. 바다가 먼 내 고향은 생선이라는 게 모두 간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때 그 갈치조림의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맛을 내는 비법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저승에 계신 어머니가 노여워할지 모르니 장맛과 손맛이 일품이었다고 해 두겠다. 그리고 맛이 들기 시작한 김장 무와 갈치의 조화라고 하겠다.
조림은 무를 큼직하고 두툼하게 썰어 먼저 안쳤다. 그 위에 갈치 토막을 얹고 양념장을 끼얹었다. 양념장은 고춧가루와 마늘, 간장을 섞었다. 된장도 아주 조금 걸러서 넣었다. 따로 육수를 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물을 잘박잘박하게 붓고 큰 솥에서 뭉근하게 끓이면 얼마 후 자작하게 졸여졌다. 그 갈치 살점의 비릿함과 잘 익어 향긋한 무의 식감이 가을의 진수珍羞로 내게 남았다.
갈치 비린내가 목욕탕에 번지기 전에 일련의 과정을 마쳤다. 때 빼고 광까지 냈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젊은 양반이라고 호칭했던 여인은 가고 없었다. 돌아갈 채비를 하려고 바구니 속 물품들을 하나씩 들어내 샤워기로 씻었다. 대충 물기를 닦아 다시 제자리에 담았다. 그러다 바구니 속에서 100ml 짜리 플라스틱 야쿠르트 병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넣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분명 속살 뽀얀 여인이 품앗이의 대가로 남겨 놓았음을 직감하였다. 그냥 가도 되었을 텐데 새콤달콤한 한 모금 인정의 맛을 기어이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여운이 가을 들판처럼 크게 다가와 야쿠르트가 담겼던 작은 빈 병을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간직했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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