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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들녘에서 유년을 만나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2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우리 대부분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한된 일상에서 하루를 보내고 한 달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일상이 따분해지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이나 오랜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한다. 특히 여행은 사람을 만나고 서로 다른 자연과 대상을 만나면서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해 준다. 때로는 일상의 에너지도 충전하고 심신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역할도 한다. 여행지는 집에서 가급적 멀리 떠나야 여행의 맛도 깊어진다.

소속된 문인협회에서 장흥으로의 문학 기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던 문우들과 함께 대형 버스에 몸을 싣고 여행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라기보다는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것도 장수 산고을에서 바다가 확 트인 바닷가 마을로의 여행은 푸른 바다와 섬, 그리고 하얀 모래 해변이 있는 남쪽 바닷가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장흥의 들녘은 보리가 금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초여름을 향하고 있다. 보리에 대한 유년의 추억이 있는 환갑을 훌쩍 넘긴 장년 문우들의 탄성이 터졌다. 그러더니 이내 보리에 관한 추억을 소환하며 유년으로 돌아가 보리농사에 관한 사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시절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던 살강 밑에 달아 둔 대소쿠리의 꽁보리밥, 입안에서 이빨 사이로 용케도 잘도 빠져나갔다. 어머니가 텃밭 상추를 뜯어 와 샘물에 씻은 상추를 손으로 잘라 고추장에 비벼 주시거나 찬물에 말아 허기를 때워 주었던 보리밥은 허기진 시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파리가 극성이던 시절 대소쿠리 채반의 틈새로 파리들이 비집고 들어가 먼저 시식하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 보리밥을 찬물에 씻어 주시기도 하였다. 통일벼가 보급되고 비료 사용이 보편화되고 쌀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보릿고개란 말은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져 갔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며 도시락 검사를 하기도 했다. 그 보리밥 도시락도 없어 우물가에서 물배를 채우던 아이들도 있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먹는 가족 밥상에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 밥그릇에만 쌀이 한 줌 섞인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손주들의 밥그릇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한 수저씩 떠 얹어 주시기도 했다.

유월에 들어서면 보리를 베어 내고 논을 쟁기질한 다음 써레를 돌려 보릿대를 밟아 넣고 다시 써레질을 하여 논을 고른 다음 모내기를 한다. 1년 중 가장 바쁜 시절이다. 이 시기에는 교실마다 빈자리가 듬성듬성하게 보인다. 어린아이들도 농번기 일손에 보태야 하기에 학교에 보내는 건 뒷전이다. 우선은 모판에 모가 더 자라기 전에 무논을 만들고 모내기해야 한다. 그러다가 때라도 놓치면 너무 웃자란 모를 작두에 윗부분을 자르고 모를 심어야 한다. 보리를 베어 다시 탈곡기에 거치는 과정은 보리 까끄라기를 뒤집어서 써야 한다. 어떤 날은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기도 하고 이튿날 학교에 가는 일도 있었다. 보리 이삭은 옷에 들어가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소매나 바짓가랑이를 타고 점점 더 위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식량이 부족했던 허기진 시절은 춘궁기를 지나면 보릿고개가 다시 찾아오고 그 고개를 넘어야 추석 명절을 맞이하고 명절이나 제삿날 쌀밥 한 그릇 먹을 수가 있었다. 쌀이 흔한 지금이야 쌀이 주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저 들녘의 누런 보리밭은 식량 증산과 퇴비 증산을 외치고 혼분식 장려 운동을 내세우던 근대화 시대에는 잡곡이 아닌 주식이었다.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들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디는 보리와 밀을 심어 보릿고개를 넘어오게 한 저 보리밭 들녘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들판의 겨울을 건너와 봄날의 초록 내음을 풀어 놓고는 금빛으로 알알이 여물어 가는 이삭 머리를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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