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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보이지 않는 꽃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12월 03일

배귀선
시인

김제 청하에 자리한 청운사로 향한다. 앞 유리에 부딪히는 바 람의 소리가 인연처럼 왔다가 흩어지고 웅크린 상점들이 입을 꼭꼭 닫은 한산한 길. 여유를 누리고픈 나는 큰 도로보다 향촌 의 소로나 구불구불 예스러운 시골길을 좋아한다.
들길 산길은 길섶에 사는 야생의 표정을 가까이 볼 수 있어 좋고 그 소박한 삶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무단 횡단하는 촌부의 느 린 걸음을 바라보며 자동차를 세운다.
겨울 허공에 떠 있는 ‘망 해사’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하룻길을 내가 선택하는 것 같 지만 시절 인연이 이루어져야 만나게 되는 것일까. 망해사란 이름에 모두 마음이 끌렸는지 들렀다 가자는 의견이 차 속을 가 득 메운다.
일행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원래의 목적지를 제쳐두 고 핸들을 돌린다.
에움길 좌우엔 지난가을의 풍요를 간직한 벼 그루터기가 일 정한 간격으로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밑동에서 겨울을 비집 고 나온, 때 없는 어린 벼 잎은 만경들녘의 땅 바람에 웅숭그린 채 하늘을 향해 옹알이고, 희뿌연 하늘엔 까마귀 떼의 군무가 한창이다. 비상 속도를 조화롭게 가감하며 강하고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분명 그들 나름의 언어 이건만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가로수 정강이가 시릴 것 같아 속도를 늦추자 오밀조밀한 마 을의 정경이 평화로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 인지 몽롱해질 때쯤 망해사 입구에 도착했다. 겨울 해풍에 바싹 웅크린 되똑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다.
누구라도 이곳에 서 면 절의 이름을 자연스레 망해사라 이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풍광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임에도 소박하다. 망망한 바 다를 향해 깨끔한 선비 한 분이 뒷짐을 지고 망연히 서 있는 듯 한 모습의 사찰이다. 백제 때 부설거사의 호흡으로 세워지고 진 묵대사가 보림保臨한 곳, 망해사. 삭풍에 부딪는 범종의 묘음에서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의 삼생연분三生緣分 숨결이 들리는 듯하 다.
수백 년 동안 한곳에 서서 사람의 눈길과 마음을 담고 살았 을 팽나무가 벼랑을 안은 채 서 있다.
한 아름이 넘는 둥치의 투 각에 깃든 세월은 내 어릴 적 당산나무를 아슴아슴 떠올리게 한 다.
내 유년의 기억이 깃든 부안의 동문 안 마을 입구엔 ‘할아버 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할머니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돌 당산이 있었다. 그 옆에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커다 란 당산나무가 할머니 당산을 양산으로 뜨거운 볕을 가려주는 것처럼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격년으로 정월대보름에 당산 제를 지냈다. 당산제에 쓰일 제수는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하 였는데, 풍물패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한바탕 굿거리를 하면 주 민들은 성의껏 돈이나 곡물을 기부했다. 한 움큼의 보리도 누 구 하나 불편한 마음으로 내어놓는 사람이 없었다. 종교적 경전 이나 조직이 아니어도 마을 사람들은 대동의 마음으로 열려 있 었다. 한줌 한줌 모인 쌀이나 보리는 줄다리기에 쓰일 동아줄이 되기도 하고 제수에 쓰일 과일과 돼지머리가 되기도 했다. 남녀 가 어우러져 줄다리기를 한 후에는 당산 돌기둥에 둘둘 감아 새 옷을 입혔다.
뒤풀이는 어김없이 당산나무 아래서 어우러지곤 하였는데, 낯모르는 길손에게도 막걸리 인심은 후했다. 술이 거나해지면 갖은 분장을 하고 농악에 맞춰 덩실덩실 덧뵈기춤을 추던 옛 어 른들의 춤사위가 지금 생각해보면 한이었으며 흥이었지 싶다.
한을 흥으로 바꿔 살아내게 했던 가난한 시절의 당산. 우리 마 을에도 현대화 바람이 불자 동네 입구를 지키며 마주 보던 장승 을 한쪽으로 옮기고 수백 년 애환이 담긴 당산나무 그늘을 베 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고 대동의 장소였던 당산나무 가 베어진 후 한동안 그곳에선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땔감이 없어 궁할 때에도 부정 탄다고 하여 가지 하나도 불쏘시개로 쓰 는 사람이 없었던 당산나무. 그런 나무를 베어서 동티가 난 거 라고 동네 어른들은 입을 모았다.
망해사의 우람한 팽나무에 우리 동네 당산나무가 겹쳐 보이 는 것은 신령한 마음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지 싶다.
맞바 람으로 맞는 북풍에 으스스 한기가 든다. 조만간 새만금 물막 이 공사로 인해 사라질 망해사 앞바다를 두고 우리는 원래 목적 지인 청운사로 향했다.
한참을 지나자 길옆 동산 자락마다 예쁘게 자리 잡은 마을들이 이따금 보이기 시작했다. 산자락에 지은 집들이 자연과 잘 어 우러져 있다.
나무 한 그루도 쉬이 베어내지 않고 조화롭게 집을 지은 선조들의 터전마다 그 지혜가 엿보인다. 그런 마을의 모퉁 이 모퉁이를 돌아들어 청운사에 닿았다.
청운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대혜大慧 보각선사普覺禪師 의 불교 서한집이 있다. 단 한 권만 전하는 희귀본으로 중국 남 송의 대선사인 대혜의 지혜서다. 대웅전에 서서 바라보니 금산 사가 있는 모악산과 이판승처럼 마주하고 있다.
이곳은 연꽃으 로도 유명한 곳이다.
하소백련지는 청운사의 연지蓮池 이름이다.
입구의 방죽에서 부터 본당으로 오르는 길 양편엔 계단식 연방죽이 층층이 만들 어져 있다.
인위적으로 물을 조절하여 여름 내내 예토穢土에서 피 어나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보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영성 지 수를 의미하는 듯한 계단식 연방죽이 우리의 걸음을 마중한다. 문득 나의 영성지수는 어디쯤일까 자문하는 순간, 스님의 합장 이 다가온다. 아상이 사라진다. 생각이 끊기는 찰나가 영원이라 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또 하나의 상을 만들며 스님의 선방에 오른다. 책꽂이에서 금방이라도 법어가 흘러나올 것 같다.
스님은 정좌의 손으로 차를 우렸다. 백련차의 향이 공간을 무심히 에두른다. 정적을 깨고 나는 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조만간 돌아가실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왜 그럴까요?”
“글쎄요, 시간을 초월한 세계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은 영을 맑게 하면 미래를 예감하기도 하지요.”
우려진 향을 남겨두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찍 찾아 든 산사의 그림자를 업고 내려오는 길. 보이는 모든 것 일체가 법문이란 생각에 딛는 걸음이 조심스럽다. 땅속 어디쯤 피어 있 을 연꽃을 생각하며 겨울 연지의 마른 연 줄기를 무심히 바라본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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