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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왜 전주를 수도로 삼았나?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5월 11일
ⓒ e-전라매일
전주[完山州]는 후백제의 고도(古都)이다. 신라말 혼란한 시기인 892년,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은 무진주(현 광주)에서 거병하여 8년 뒤인 900년에 전주에서 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정개(正開)라는 연호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신라의 행정체제를 기준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오월(吳越)과 통교하였으며 일생동안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투에 몸을 담았다. 한때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으나 936년 2대 왕 신검대에 고려 왕건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후백제가 전주에 정도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엇보다도 신라 통일후 전주가 군사도시로 성장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백제부흥세력을 제압하고 당을 축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백제의 고지가 아닌 신도시 전주를 전략적 거점으로 선택했다. 신문왕 5년(685) 완산주의 설치는 그 결과물이다. 이는 이전의 정치적 거점인 익산의 금마, 고부의 고사부리, 김제의 벽골제를 넘어 완산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배경의 핵심은 백제부흥운동으로 유독 전북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났으며 신라는 백제의 저항세력을 비롯하여 당과의 전쟁을 극복해야 했다. 일련의 통일전쟁 이후 상황이 정리되고 드디어 신문왕 5년(685) 전주에 완산주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체제를 완비하였다. 전주(全州)의 완산주 설치는 10여 년 동안 여러 전투를 겪고 백제지역을 확보하면서 도출한 결정이다. 정치적 중심지이자 백제 유민의 저항이 강한 웅천주를 피하고 지리적으로 변방인 무진주 지역보다는 완산주에 군사적 비중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백제와 당의 세력을 축출하며 옛 백제 지역을 통합 지배하려는 의도였다.
지리적인 여건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주는 동부의 신라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서부의 백제로 가는 교통상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후백제 견훤이 비록 무진주에서 거병하였으나 스스로 왕이라 하지 못하고 전주자사(全州刺史)로 칭하는 것을 볼 때 이미 전주는 백제 지역 중 신라의 주치로서 가장 중심이었다. 신라는 옛 백제지역인 금마, 김제, 고부 등의 서부지역과 경주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상의 요충지인 남원, 임실, 진안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가장 빠르게 백제의 옛 고지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정학적 위치는 산간지대를 넘어 평야지대로 이어지는 종착지 전주였다.
두 번째로 견훤이 일통삼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완산주에 이르러 백제의 기원을 금마(金馬)로 보고 삼한의 시작을 마한에서 찾고 있어 고조선, 마한, 백제의 계승 인식을 강하게 표방하고 있다. 견훤이 계승한 백제가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신라말의 혼란한 사회를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백제의 땅인 전주에서 이념적으로 무장하고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 셈이다.
세 번째로는 처음 수도였던 무진주(광주) 위상의 약화이다. 후백제는 초기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교역망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장보고의 청해진 이래 대 중국의 창구였던 영산강 하류를 확보하기 못한 후백제는 전주 천도 후 10년에 걸쳐 나주를 공략한다. 결국 영산강 유역이 아닌 줄포만이나 고군산도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종합적으로 전주가 주치로서 핵심지역으로 부상되었고, 삼국을 통일함에 있어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삼한을 통일하기 위한 최적의 지리적 위치에 전주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기 완주에는 후백제 최고의 불교조각으로 추정되는 봉림사지 출토 삼존불·석탑·석등이 확인되고 익산 미륵사 개탑(922년)이나 왕궁리 석탑이 축조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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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수도 전주에 남아있는 흔적?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사료에는 고토성에 대한 언급이 전부이고 동고산성은 ‘성황사중창기(1688년)’에 견훤궁터로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완산, 전주, 남고산성은 견훤성으로 통칭하는데 이는 전주를 대표하는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체적인 유적과 일치한 부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후백제 견훤도성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접근은 1942년 발간된『전주부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주 도심에 남아있는 잔존 유적, 수집 유물, 구전 전승을 바탕으로 후백제 전주도성의 구조와 범위를 보여주는 도면과 설명이 제1편 통설 ‘제2장 후백제와 전주’, 제4편 각설 ‘제12장 명승 구적(舊蹟)’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내용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더욱 발전되는 양상이다. 따라서 견훤의 전주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선『전주부사』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고 이에 핵심적인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전주부사』의 집필진을 살펴보면 제1편 통설 저술 및 감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를 제외하고 가메다 마사시(龜田正)와 나미마스 시게루(浪松茂) 편찬자 2인은 역사에 종사한 인물이 아니며 이들 모두 역사·고고학 연구 분야와 무관하다. 집필 기간에서도『전주부사』편찬 7년의 중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의 병가가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등 2년간 여러 번에 걸쳐 집필이 중단될 정도로『전주부사』편찬 작업은 녹녹지 않은 상황이었다. 도시환경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어 전주史나 후백제에 관한 이야기는 관찰자의 눈이라는 한계를 집필자가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결국 전주의 근고사(近古史) 정보를 제공하여『전주부사』의 발간에 도움을 준 효산 이광열의 역사관이 보이지 않게 작용되는데 이 또한 후백제에 대한 조선후기와 근세의 전통적 역사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후백제 도성구조의 내용 중『전주부사』에서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은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사진, 인공물의 흔적이 담긴 유적의 서술, 근대적인 관점에서의 후백제 도성구조를 표현한 도면과 서술, 후백제 도성을 유추할 수 있는 당시의 도시환경 정보 등이다.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제시된 후백제 도성구조에 대한 최초의 논지는 1970년 이후 고고학적 방법으로 여러 번 검토되었으나 변화가 많은 도시환경이라는 특수성과 잔존 유적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매번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발굴과 같은 고고학적 방법론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데, 예로『전주부사』서술 당시 활용할 생각을 못 했거나 이후 적용된 기술에서 후백제 전주도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찾는 게 이제는 가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전주부사』발간 6년 후 촬영한 항공사진이 남아있고 보다 이전인 1912년에는 전주 전역에 대한 지적도가 작성되었다. 또한 1918년·1939년에 만들어진 지형도에서도 후백제의 고성 흔적이 뚜렷이 엿보인다. 1970년대 이후에는 동고산성·전라감영 등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2003년에는 전주부성 축성 기록인 『축성계초』(1733년) 등 새로운 자료도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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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성은 견훤이 쌓은 최초의 성이다.
‘전주부사’에서 고토성의 범위는 삽도 ‘全州府境域沿革圖’에 고성벽지로 표시된 굵은 선으로 둘러싸인 곳 중 가타쿠라(片倉) 제사공장에서 화장터까지 이어지는 1,000m의 성벽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성벽지는 고토성에 이어 형무소 외곽과 노송동 동쪽 산능선을 따라 동고산성과 남고산성과도 연결되고 오목대에서 철로를 따라 북서진하다가 여단으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을 상정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전주부성 외곽에 존재하는 성벽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료에는 주치인 전주성(읍성)을 제외하고 동국여지승람(1530년)에 ‘고토성은 북쪽 5리에 위치하고 견훤이 쌓은 것’으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후 성황사중창기(1688년)에 동고산성으로 추정되는 견훤궁터가 등장한다. 견훤 기록과 관련된 남고산성은 한참 뒤인 여지도서(1757년)가 처음이다. 남고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순 고덕산석성·고덕산성으로만 기록되고 있어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남고산성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남고산성=견훤성의 인식이 생긴듯하다. 이 내용은 이미 남고산성 발굴조사에서 故 전영래 선생이 밝힌 바 있다. 서고산성은 일제강점기 ‘국유림도면’(1916년),『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등장하나 후백제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 이외 후백제 도성과 관련된 핵심 시설로 추정되는 오목대토성, 노송정 90-2토축물, 자만동성벽 등에 대해서는『전주부사』이전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토성은 이후에도 <여지도서>(1757년), <전주부읍지>(1760년경), <전라도영사례>(1792년), <호남읍지>(1871년), <완산지>(1905년경)에 이르기까지 줄곧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조선시대 내내 후백제 잔상의 상징이었다. 지리지 이외에 전라관찰사를 지내며 1734년 전주부성을 전면적으로 개축한 조현명(1690~1752년)은 새 성인 전주부성과 견훤 고성(고토성)을 비교하는 시를 남기어 전주부성 외곽에 견훤이 쌓은 성이 존재함을 나타냈다. 근대 이후에는 보다 실제적인 고토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데, 1925년 최남선은 전주를 기행하며 호남선에서 직각으로 전주형무소까지 일자로 이어지는 고토성의 모습을『심춘순례』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그때까지 이 성이 남아있음은 확실하다.
이후 1918년 <전주지도>와 1939년 <전주시가지계획평면도>에도 약 400m의 줄기로 남아있으며, 1948년과 1954년 <전주시 항공사진>에도 고토성의 줄기를 찾을 수 있다. 현재에도 전주중앙중학교 앞길을 따라 기린로-미당교회-전주동부교회 주차창을 가로질러 전주 동덕사 뒤까지(구 여단터) 연결되는 소로가 있는데, 이는 현재의 도시계획과 전혀 일치하지 않은 구도로인 고토성 줄기이다. 또한 이 길을 따라 전주 중앙중학교운동장, 전주동부교회 주차장, 전주 동덕사 뒤편에서는 현재도 후삼국시대를 포함하고 있는 집선문 계열의 와편과 도기편이 종종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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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로 확인된 오목대토성과 그 주변 성벽
오목대토성과 그 주변 성벽은『전주부사』제12장 명승고적 ‘오목대’에 소개되어 있다. 오목대토성은 동편 우측에서 전라선을 따라 직선으로, 또 하나는 오목대에서 관선교천을 넘어 직선으로 간납대까지, 나머지 하나는 자만동 제각까지 직각으로 뻗은 성벽을 말한다. 먼저 오목대 토성은 2015년 시굴조사로 그 전모가 일부 밝혀졌다. 오목대토성은 조사 결과 길이 261m, 너비 8m, 높이 3~5m 규모이며 자연 단애면을 활용한 북서쪽은 240m, 전체 약 500m 규모의 토석+와적이 혼축된 퇴뫼식 토성이다. 남쪽에는 약 80m 규모로 성벽을 덧댔다. 성벽의 구조는 후백제 산성으로 비정되는 순천 해룡산성과 유사하다. 매우 급하게 축조되어 당시 혼란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하게 후백제를 포함한 시기에 축조된 성벽이다. 기린로변은 1/2이 파괴되었고 오목대碑의 중요성으로 중심지역은 조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이다. 아마도 고토성, 간납대 성벽(노송정 91-2)도 유사한 구조일 것이다. 1948년·1954년 항공사진에서도 확인된다.
노송정 90-2 토축물은『전주부사』에 성벽의 구체적인 사진이 게재되어 있으나 현재는 파괴되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고 성벽라인의 소로가 남아 있는 상태이며 주변에서 후백제시기를 포함한 와당·청자·와편이 다수 확인된다. 오목대에서 현 캠핑장 우측과 천주교 교구청(간납대)까지 사선으로 약 300m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은 동고산성과 낙수정 범종이 출토된 절터 입구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분명 어떤 의도로 전주시내와 공간을 구획하기 위해 만든 성벽이다. 지적도에 90-2지번은 존재하지 않아 91-2번지의 오기로 보인다. 1912년 지적도, 1918년·1936년 지형도, 1948년·1954년 항공사진에서도 확인된다.『전주부사』도면에는 표현이 안 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자만동과 연결된 성벽이 추정되는데 현재 자만동 제각 주위로 당시의 주춧돌로 사용했음직한 석재와 다량의 와편과 도기편이 확인된다. 이곳에서 자연능선으로 발산과 동고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표기되어 있다.

견훤도성의 왕궁지와 서쪽성벽은 재검토가 필요
『전주부사』에서 고성벽지로 지정한 성벽 중 오목대에서 전라선을 따라 북으로 전주초등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지나 구여단터까지 연결되는 성벽이 있다. 견훤도성의 서성벽으로 알려진 곳이다. 세부적으로 1,000m 길이의 고토성을 후백제 도성의 백호 좌단으로 보고, 우단에 위치한 물왕멀 왕궁 추정지 앞에 천이 흐르는 것을 가정하고 이어 왕궁의 뒤에서부터 오목대까지 연결되는 성벽으로 설명하였다. 故 전영래선생은 왕궁이 반월형의 서쪽 성벽의 밖에 위치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왕궁 앞으로 서성벽을 다시 옮겼고 이후 줄곧 후백제 서성벽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후기 읍지『완산지』향기리언(鄕里記言)에 “남대천은 옛날 오목대 아래로 흘러가서 하천을 이루었고, 물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늘날 민가사이를 1척 남짓 파면 왕왕 모래와 자갈들 뿐이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옛날 물이 푸른 밭같은 구릉으로 흘러서 이렇게 변하였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다.”라는 내용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향리기언의 ‘옛날’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옛날’은 구전으로 완산지를 편찬할 당대에 가까운 시간이 아니다. 물길이나 하상퇴적층은 지리학적 관점으로 역사시대의 일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후백제의 도시가 들어설 환경에 서쪽의 전주시내에 는 이미 대규모의 통일신라시기 군사도시가 존재하고 있어 동쪽과 분리되는 환경이 아니었다. 서성벽의 라인은 기록 이외에도 1900년대 산업화 이전의 마지막 전주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적도(1912년)와도 일치하지 않고 이외 지형도, 항공사진, 유물출토상황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후백제 견훤도성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한 부분으로 여기에는 전주천과 역사상 많은 국가들의 도성플랜과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왕궁지에 대해서도 『전주부사』에는 그 증거로 ‘사각형의 커다란 석재와 천석(川石)이 대략 1만 개 정도 엄존했다’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왕궁과 관련된 각진 석재와 냇돌 1만여 개는 최근 발굴조사 결과 냇돌은 근대의 산물이고 왕궁의 시설이나 성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부 각진 석재는 26개 정도가 있었으나 이 또한 궁성이나 성벽이 아닌 일부 건물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를 특정할 수도 없다. 비슷한 양상을 살펴볼 때 나주 자미산성의 건물지에서 초석으로 발견된 사례가 있어 주목되며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후백제에 대한 조사연구가 최근 증가되고 있다. 후백제 역사와 고고학의 발전을 위해 가시적으로 확인된 유적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나마 실낱같이 남은 유적이 지금도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사된 유적은 확실하게 보존해야한다. 보이지 않는 후백제 유적은 그 다음의 일이다.
/편집=송선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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