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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이 없는 방 [2024신춘문예-소설]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1월 01일
욕조요? 욕조 있는 원룸이 어디 있겠어요.
욕조가 있는 방을 구한다는 묘희의 말에 소장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건조하게 되물었다. 커피 자판기 위에 놓인 조그마한 텔레비전에서는 우람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 가득 주렁주렁 앉은 긴팔원숭이들이 서로의 털을 골라주고 있었다.

동물의 왕국을 아직도 하네요.
묘희의 말에 소장은 뜬금없이 전직 대통령도 즐겨보던 프로라는 대답을 했다. 묘희는 주말 저녁 사저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털 고르기 중인 원숭이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저런 걸 왜 봤을까요. 외로웠을까요?
글쎄요. 동물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던데 그 복잡한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묘희는 소장이 내민 뜨거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동물은 배신하지 않을까, 그 대통령 곁에도 더운 품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생각해보다가 소파에 엉덩이 끝만 걸치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딱히 둘 곳 없던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시켰다.
원숭이들은 털 고르기에 하루 네 시간을 쏟을 만큼 정성을 들입니다. 이런 그루밍은 모여 사는 무리 사이에서 유발되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고도로 발달시킨 사회성의 한 표현이죠.
내레이터는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화면마다 조곤조곤 설명을 달고 있었다. 묘희에게 소개할 매물을 확인하느라 장부를 넘겨보고 있던 소장도 텔레비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한마디 툭 던졌다.
스트레스 받아가며 뭐 하러 아등바등 모여 산담.
마치 소장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듯한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빨도 발톱도 날개도 갖지 못한 호미닌은 포식자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 된 데는 이런 유전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원숭이들은 아무하고나 털 고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루밍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애무에 가까운 표현으로 엔도르핀 유발 인자로 작용합니다. 긴장을 해소할 새로운 방법을 터득한 현대인들에게도 신체 접촉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피부와 피부의 접촉을 통한 체온의 교류는 면역력을 강화시킨다고 하지요. 혼자 사는 사람의 조기 사망 가능성은 함께 사는 사람에 비해 17퍼센트나 높다고 합니다.
소장을 따라 몇 군데 비슷비슷한 방들을 둘러보고 나서 묘희는 북쪽 창 너머로 놀이터와 그네가 보이는 풀 하우스 205호를 계약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물었다.
근데 왜 이곳 사람들은 창에 커튼을 달지 않을까요? 오늘 둘러본 집들 중에 커튼을 단 곳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까다로워 보이던 묘희가 의외로 쉽게 결정했기 때문인지 소장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싹싹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거 같네요. 다들 곧 여기를 떠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원룸은 계약기간이 1년이라 손쉽게 옮길 수 있는 데도 생각보다 이사가 많지 않아요. 그래도 늘 방이 아니라 집에서 살아야지 하면서 제대로 된 삶을 미루고 있는 거겠죠.
맞는 말 같아서 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 작성을 마치고 나서 소장은 허브차를 내오며 말했다.
책을 좋아하나 봐요. 저도 책 좋아하는데. 가끔 놀러오세요. 심심할 때 차나
한 잔 하게요. 여긴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다들 모르는 사람이에요. 새 친구를 만들지 않거든요. 사실 혼자가 편하죠. 그래도 더러 좀 쓸쓸할 때가 있더라고요. 가끔 저는 일부러 131에 전화해서 일기예보를 들어요. 저녁엔 추워지니까 옷 든든히 입으라거나 내일은 비가 오니까 우산 챙기라거나, 그런 다정한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묘희의 숄더백에 꽂혀 있는 책을 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동산 사무실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책들이 전기 드릴, 미니 선풍기 같은 물건들과 함께 사무실 구석 자리를 차지한 채 쌓여 있었다. 묘희는 고개를 돌려 외로울 때 일기예보를 듣는다는 소장의 눈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짙은 눈 화장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그녀의 눈빛이 좀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세상에 책이 있어서 다행이죠.
묘희의 말에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를 받아들고 부동산을 나서던 묘희는 자신이 살게 될 낯선 동네를 쭉 훑어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시야를 가리고 늘어 서 있었다. 마지막 녹지를 끼고 있던 육군부대가 인근 군으로 이전해 가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 단지와 원룸 촌이 들어섰을 때, 저
수많은 방들을 누가 채우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가계 유형이 되었다는 통계청 발표를 증명하듯 앞 다투어 건물이 완공되면 또 앞 다투어 누군가 들어와 살았다. 다들 묘희처럼 이삿짐이 많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는 것이 많은 동네에서 묘희도 혼자 두 해를 살았다.

묘희는 유독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 좁고 아늑한 곳 그리고 살을 좋아했다. 영화관이나 카페 구석자리에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율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점점 부풀어 올라 부러질 것처럼 단단해지면 묘희는 가만히 손을 뺐다. 그런 묘희와 눈길이 마주치면 율은 피식 웃으며 소유권을 확인하는 도장을 찍듯 이마에 더운 입술을 꾹 눌러주곤 했다. 묘희가 기운 없어 보일 때면 어김없이 물었다.
업어줄까?
율의 등에 업혀서야 묘희는 생기를 찾고서 무어라 종알댔다.
나, 애정결핍인가 봐. 진화가 덜 됐던가. 당신 체온 없이는 못 살 거 같아.
율이 대답했다.
결핍이 아니라 충만 아닐까. 당신 어릴 때 곧잘 할머니 등에 업혀 옛날 얘길 듣다가 잠들었다고 했잖아. 그 따뜻한 체온과 목소리를 당신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엄마의 부재가 아니라 할머니의 존재를 먼저
알아봐준 사람.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라고 말해준 드문 사람. 율이 괜찮다고 말해주면 묘희는 정말 다 괜찮아진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율은 두꺼운 책이 빼곡하게 꽂힌 커다란 책장을 가지고 있었다. 묘희는 큰 책장을 가진 사람을 믿었다.
율이 불 앞에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 때면 묘희는 율의 등에 제 등을 기대고 서서 책을 읽어주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율은 발끝을 묘희의 발가락 위에 지긋이 올려놓곤 했다. 묘희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율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당신 날아가 버릴까봐. 그럴 때면 묘희의 가슴 속 여러 갈피에 깃든 까닭모를 슬픔과 까닭을 아는 불안 같은 아리고 조급한 감정들이 묵직하고 평온하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

퇴근 후에 묘희는 창가에 서서 놀이터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북향집이라도 놀이터 옆 건물로 이사 오길 잘 한 것 같다고. 재잘대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빈 그네 혼자 흔들리는 걸 보고 묘희는 얼른 책을 들고 내려가 그네에 앉았다. 어린 시절 엄마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마당가 감나무에 걸어준 그네가 있었다. 텅 빈 집에서 어린 묘희는 그네에 앉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동화책을 읽곤 했다. 제 어린 날들을 생각해보다가 왠지 쓸쓸해져서 들고 나온 시집을 펼쳐들었다.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묘희는 깜짝 놀라서 읽고 있던 시집을 툭 떨어뜨렸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놀이터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책장에 묻은 모래알들을 털어낸 뒤 제 가슴을 빨리 뛰게 만든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씨발년아, 거기 안 서? 고함을 지르며 아저씨가 이쪽을 쳐다본다
욕은 다 내 얘기인 것 같아 일단 거기에 서 있는다 김소연 시집 『i에게』 , 「출구」 마지막 문장


묘희는 자기도 일단, 서 있어야만 할 것 같아 천천히 그네에서 일어섰다. 일어서고 보니 괜히 머쓱해져서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풍이 헝클어 놓은 놀이터 위로, 가로등 불빛이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묘희는 다시 그네에 앉았다. 잔잔한 그네의 흔들림이 요람처럼 묘희의 가슴을 다독거렸다. 한랑한랑 그네를 타다가 몸을 세우고 일어섰다. 그네가 균형을 잃고 잠시 흔들렸다. 묘희는 가느다란 줄을 꼭 붙잡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굴렸다. 기필코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야 말겠다는 듯이 가열하게 점점 더 가열하게 바람을 갈랐다.
묘희는 발을 끌어 그네의 속도를 조금씩 늦춘 뒤 휴대폰을 꺼내 율의 번호를 열어보았다. 번호 아래로 열일곱 통의 부재중 전화가 달려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묘희는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가 문득 131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날씨입니다. 먼저 기상정보입니다. 태풍이 지나간 남해안 상공에 찬 공기가 머물면서 오늘은 평년보다 낮은 기온 분포를 보이겠습니다. 당분간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겠으니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두어 번 반복해 일기예보를 듣다가 옷 든든하게 챙겨 입으라는 말과
기온차가 크겠으니 건강관리에 유의하기 바란다는 말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길 없는 심연을 발견하고 폰을 내려놓았다. 밤바람이 제법 쌀랑했다. 묘희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아래 나직하게 서 있는 어린 살구나무 가지 하나가 태풍에 찢겨 부러진 팔처럼 매달려 있었다. 가지 끝에 달린 푸른 잎들도 그새 생기를 잃고 축 늘어졌다. 묘희도 학창시절 체력장 뒷날처럼 몸이 무거웠다. 물이 든 매장 창고를 밤늦게까지 정리하느라 팔을 좀 많이 쓴 모양이었다. 무거운 몸을 훌훌 벗어던지고 뜨거운 욕조에 푹 잠기고 싶었다. 묘희는 그네를 털고 일어서서 욕조가 없는 자기 방을 올려다보았다. 봄날 자운영 꽃밭 같던 율의 더운 품을 생각했다.

*

의류 회사 VMD 파트에서 일하던 묘희가 결혼을 앞두고 사직서를 냈을 때, 제하가 근무하는 남쪽 도시에 마침 대리점 하나가 비었다며 매장 인수를 권한 건 학교 선배인 영업부 김차장이었다. 제하가 주말 부부로 떨어져 사는 걸 반대해서 어쩔 수 없이 퇴사할 마음을 먹었지만, 직장생활 10년 차에 경단녀가 되기는 싫었기에 묘희는 그 제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제하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프랜차이즈 대리점이라 해도 자영업자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장 디스플레이를 하고 옷을 판매하는 본업 말고도 신경 쓸 일들이 많았다. 수십 년 전에 지어졌다는 오래된 매장은 외관만 번듯했지 비가 잦은 철이면 늘 어느 구석에선가 물이 스며들었다. 난데없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창고 귀퉁이에서 곰팡이가 올라왔고 수도꼭지가 헛돌았다. 하지만 낡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어시장을 낀 구도심에서 반듯한 매장 얻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공병대 출신에 손재주까지 좋은 제하가 퇴근길에 들러서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해 주었기에 그 정도는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연례행사처럼 가을 태풍이 불어올 때면 묘희는 맥이 탁 풀렸다.
윈도우 밖은 전쟁터 같았다. 거친 비바람 속에 귀퉁이를 뜯긴 스티로폼 박스와 찢어진 비닐봉지가 탈주로를 잃은 적군처럼 비장하게 날아다니고 빗방울은 수십 발 총알을 장전한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빠른 속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총알이 빗방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가 묘희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머그잔에 커피믹서 세 개를 한꺼번에 뜯어 넣었다. 선 채로 후루룩 커피를 마신 뒤 면장갑을 끼고 창고로 들어갔다. 그새 바닥에는 빗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묘희는 서둘러 아래 칸에 쌓인 제품들을 높은 칸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혼자 하려니 일이 더뎠다. 오늘 같은 날 무슨 손님이 있겠냐며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일이 후회되었다. 묘희가 딛고 선 플라스틱 간이 의자 아래로도 빗물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사는 매니저라도 다시 불러야겠다 싶어서 카운터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때 누군가 우산을 접으며 급하게 매장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 비바람을 뚫고 옷을 사러 올 사람은 없을 텐데 누군가 싶었다. 제하였다.
그의 손에는 동그랗게 말린 호스가 들려 있었다. 묘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창고로 들어가 능숙하게 간이 펌프를 설치하고 긴 호스를 풀어서 화장실 배수구 앞까지 끌어다 놓았다. 윙 두통 앓는 소리를 내며 펌프가 빗물을 퍼내는 동안 제하는 바닥에 놓인 제품 박스들을 번쩍 들어서 가볍게 위쪽으로 옮겨놓았다. 별거를 시작하고 난 뒤에도 제하는 종종 이런 식으로 묘희 앞에 나타났다.
이만하기 다행이다. 커피 한 잔 줄래?
묘희는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해마다 잠기는 곳인데 올해라고 다를까. 만조 시간이 겹친다는 뉴스를 들었어.
묘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묘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하는 종이컵을 쭈그려 휴지통에 툭 던져 넣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번 태풍은 진행 속도가 빨라서 두어 시간 후면 남해상으로 빠져나갈 거래. 태풍은 장마랑 달라서 일단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화창해지는 거 너도 알지? 퇴근할 때 운전 조심하고. 너
비올 때 차선 잘 못 보잖아. 차선 자꾸 바꾸지 말고 앞차만 따라가. 그게 제일 안전해. 갈게.
묘희는 앞차만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엄마한테 실버카 사드렸어? 이제 그런 거 하지 마.
제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되물었다.
내일 법원에 올 거지? 마치고 저녁 같이 먹을까.
묘희는 폭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너 왜 그래? 나 보는 거 지옥일 텐데. 이제 노래도 그만 보내.
말없이 묘희를 바라보던 제하는 우산도 펴지 않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젖어가는 제하의 등을 바라보며 묘희는 오래 전 노래방을 생각했다. 둘은 복고 바람이 불어 다시 유행하는 포크송과 발라드를 번갈아 부르다가 기분이 좋을 때면 낯간지러운 트로트까지 함께 불렀다. 돌아오던 길에 묘희가 물었다.
너도 내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올 거니?
그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무조건 무조건이야.
제하가 커다랗게 웃으며 노래가사를 흉내 냈다.
우리 사이가 끝났을 때도?
묘희의 난데없는 질문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제하는 가볍게 대답했다.
우리가 왜 끝나? 우리는 끝나지 않아.
그때는 묘희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신에 찬 제하의 대답이 불편해서 토를 달았다.
미래를 어떻게 알아? 모든 건 변하잖아. 변화를 긍정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성도 없어. 끊임없이 탈주하지 않으면 포획되고 말아. 포획하면 길들이잖아. 인간이 소를 길들인 것처럼. 난 여물보다 들판이 좋은 걸.
묘희의 입에서 평소에 쓰지 않던 낯설고 거창한 말들이 흘러나오자 제하의 입가에서 피다만 웃음이 빠르게 시들었다.
너 철학책 좀 그만 읽어. 세상은 책이 아니야. 변화는 위험해. 만약에 네가 변한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아.
제하는 묘희가 주말마다 책 읽는 모임에 나가는 걸 못마땅해 했다. 묘희는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럼 나 업어줘.
하지만 제하는 업어주지 않았다. 누가 보면 어쩔 거냐면서.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시간을 아까워하던 묘희는 종종 퇴근길에 제하와 함께 아파트 상가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돌아오는 길에 동전노래방에 들러 노래를 부르곤 했다. 묘희는 음치에 가까웠지만 제하는 표 나지 않게 묘희가 힘들어하는 고음 부분에서 마이크를 들어 목소리를 보태주었다. 그러니까 묘희의
고음불가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제하를 생각하면 먹먹하고 막막해져서 묘희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추석날 아침 텅 빈 영화관에서 혼자 본 우디 앨런의 영화 속 대사 한 줄이 떠올랐다. 인생은 인생만의 계획이 있다고 했던가.

*

오전부터 서성대던 묘희는 점심때가 지나자 윈도우 마네킹 옷을 바꿔 입히다 말고 팔 한쪽을 던져놓고 매장을
빠져 나왔다. 태풍이 지나간 뒤 날이 제법 차가워진 까닭인지 코리아세일페스타 프로모션 효과인지 고객이 좀 드는 날이었다. 여름 내내 부진했던 매출을 생각하면 당연히 묘희가 매장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부가가치세 납부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조급해진 묘희를 붙잡지 못했다. 오늘이 결심공판 날이란 걸 알고 있던 매니저는 두 말없이 마네킹 팔을 집어 들었다. 묘희는 핸드백을 챙겨들고 주차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보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공판에 가보고 싶었던 걸까. 그건 아니었다. 묘희는 첫 소송에서 세 번째 변론기일에 딱 한 번 법정에 출석했다. 다소 결연한 마음으로 법정에 섰지만 공판은 5분 만에 끝이 났다. 젊은 판사는 미간을 좁힌 채 곁눈질로 묘희를 흘깃 한번 보고나서 서류를 넘기며 양쪽 변호인에게 몇 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3분이었는지도 몰랐다. 소송이 민원센터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문득 당황스러웠을까. 묘희는 조금 전에 세워둔 차를 찾지 못해서 넓지도 않은 법원주차장을 한참 헤맸다.
돌아와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사건 검색을 해보니 속행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어진 공판들도 전부 속행으로 이루어졌지만 소송은 속행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늦게 돌아온 날에도 제하가 현관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는 진술서를 내거나, 제하가 묘희 몰래 차에 위치 추적기를 달았다는 준비서면을 내고 나면, 매번 두어 달이 지나서야 다음 기일이 잡혔다. 처음에 다섯 달이면 끝난다고 했던 소송이 일 년을 넘기자 변호사는 변명삼아 말했다.
별거 기간이 길어지면 우리한테 유리한 거 아니겠어요.
의미 없는 얘기였다. 법원의 판단 기준이 바뀌지 않는 이상 묘희는 영영 제하의 등기부 아래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소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시작한 소송이었다. 어떻게든 끝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제하에게만은 자신이 유죄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묘희가 이혼 전문 법률사무소를 처음 찾아갔을 때 변호사가 물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는 기각이란 걸 아실 텐데 승산이 희박한 소송을 왜 하려고 하죠?
볼펜을 거꾸로 세워 들고 탁자를 톡톡 치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변호사를 바라보다가 묘희는 점심 때 들렀던 식당 아주머니의 날이 선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이고 낯짝도 두꺼워라.
미친년놈들이 아직도 얼굴을 들고 다니네, 지랄도 풍년이지. 뭐로 드릴까? 오늘은 동태찌개가 괜찮은데.
맞은편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낯익은 감독과 여배우가 레드 카펫 위에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묘희는 몇 년 전 그들이 한 말을 지금도 기억했다.
계획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 만남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묘희는 뉴스를 들으며 천천히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식당 아주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이해했지만 철 이른 동태찌개는 맛이 없었다.
퇴근시간도 아닌데 차가 밀렸다. 어디서 사고가 났는지 요란하게 견인차가 달려갔다. 커다란 청소차까지 4차선 도로를 차지하고 느리게 태풍의 흔적을 삼키며 움직이고 있어서 정체가 더 심했다. 묘희는 라디오를 켜고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파랗게 시침을 떼고 있었다. 귀에 익은 노래 소리에 정신을 팔고 있던 묘희를 차는 어김없이 집 앞으로 데려왔다.

스크린 도어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묘희는 발길을 돌려 놀이터로 향했다. 한랑한랑 그네에 몸을 맡긴 묘희 곁으로 윤기 나는 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긴 꼬리를 세우고 다가왔다. 가끔
참치 캔을 주곤 하던 고양이였다. 묘희는 가만가만 고양이 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가르릉 가르릉 낮은 소리를 내며 등을 둥글게 세웠다. 매끈하고 가지런한 털 아래로 말랑한 살의 온기가 전해왔다. 묘희는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남편이 해외출장 가고 없는 한 달 동안,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키우던 고양이 꼬리를 꼭 잡고 잤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고양이나 키워 볼까. 하지만 곧 고양이는 몸을 둥글려 묘희의 팔을 빠져나갔다. 우아하게 멀어져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묘희는 발을 굴려 그네에 속도를 냈다. 바람의 손길이 묘희를 그루밍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묶으려는데 팔 올릴 힘이 없더라.
언젠가 묘희가 무심코 이런 말을 했을 때, 다음날 율은 삶은 달걀을 빼곡히 담은 찬통을 건네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잘 좀
챙겨먹어. 샐러드만 먹지 말고. 볕 좋을 때 틈틈이 좀 걷고.
그때는 그럴게 해놓고도 흘려들었지만 이제 묘희도 햇빛의 힘을 믿었다. 햇빛은 젖은 빨래도 말리지만 정말로 젖은 마음도 말려 주었다. 묘희는 그네를 밀어두고 가을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놀이터 가장자리 낮은 둔덕에는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잔디들 사이로 기세 좋게 번져가는 토끼풀들이 지천이었다. 행여 네 잎짜리 행운을 발견할 수 있으려나. 묘희는 쪼그리고 앉아 여린 풀잎들을 살살 헤치며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아마 열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묘희가 다니던 중학교는 해마다 오월이면
자매 결연을 맺고 있던 미국의 한 공립학교 학생들과 펜팔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린 묘희도 미국 맨해튼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배급받듯 받아들었다. 영한사전을 찾아가며 편지를 읽어보려 했지만 더구나 필기체여서 묘희가 이해한 부분은 몇 줄 되지 않았다. 두 살 터울 오빠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겨우겨우 열 두어 줄짜리 답장을 썼지만 몇 번을 읽어봐도 너무 상투적이었다. 묘희는 코팅해서 일기장에 끼워두었던 네잎클로버를 큰맘 먹고 편지지 사이에 넣어 보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때 행운을 바다 건너보낸 게 실수였을까 생각하던 순간 묘희의 눈에 네잎클로버 한 장이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잎을 따려고 손을 내밀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행운이라는 말의 심리적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너무 멀었다. 네 잎의 행운은 그 자리에 그냥 두기로 했다. 언젠가 무슨 얘기 끝에 묘희가 말했다.
불행한 삶이 무서운 게 아니라 불행조차 없는 삶이 더 무서운 거래.
율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멋진 말이다.

*

가을볕이 좋은 오후였지만 집안은 고르게 어두웠다. 묘희는 좁은 식탁 위에 노트북과 장부를 펼쳐놓고 월말 결산을 시작했다. 여러 번 계산을 해봐도 매번 합계가 다르게 나왔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묘희는 노트북을 접고 일어서서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다시 놀이터로 내려와 그네 앞 벤치에 앉았다. 시계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표지와 속지 몇 장이 찢겨나간 책을 넘기다가 책갈피가 꽂혀 있는 페이지를 폈다. 글자보다 먼저 빛바랜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핏자국이었다.

율의 오피스텔로 제하가 들이닥쳤을 때 당연한 일처럼 의자 다리가 부서지고 유리창에 금이 갔다.
한 마디 욕조차 오가지 않았지만 거친 몸싸움이었다. 그 격한 고요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묘희는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된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슬로우 비디오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었을 때 비로소 묘희는 몸을 떨었다. 제하의 손에 끌려 집으로 돌아온 묘희는 종일 도망치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하는 수면유도제 여러 알을 먹고도 잠들지 못해 웅크리고 잠든 묘희의 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옥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제하는 묘희를 흔들어 깨워 물었다.
이 책이지? 네 구두가 가지런히 놓인 그 집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었어. 그 자식이 너한테 책 읽어주는 소리를. 너 책에 빠진 거니, 그 자식한테 빠진 거니?
제하는 거칠게 묘희를 다시 일으켜 앉히고는 책장을 찢으며 소리쳤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당장 끝내지 않으면 학교에 투서할 거야. 왜? 못할 것 같아. 그 잘난 시간 강사 따위 당장 내일이라도 파면시킬 수 있어. 그 자식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제하와 오년을 사랑하고 결혼해서 또 오년을 살았다. 그의 말이 협박이 아니라는 걸 묘희도 알고 있었다. 썰물 지나간 밤바다
모래무더기처럼 무너져 내린 묘희 앞에 제하는 무릎을 꺾고 앉아 조용히 울었다. 묘희는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갔다. 무작정 차를 몰아 밤길을 달렸다. 도시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섰을 때 그제야 앙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래도 된다면 울고 있는 제하를 정말이지 꼭 한 번만이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속 걸려오는 율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율은 다음 학기 전임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었다.

책장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책을 적신 눈물 자국을 바라보다가 묘희는 율이 읽어주던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끄럼틀을 타고 쪼르륵 내려오던 꼬맹이 하나가 묘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큰일 난 것처럼 소리치면서 그네 쪽으로 뛰어갔다.
엄마, 여기 어떤 이모가 울어.
무안해진 묘희는 손등으로 눈가를 슥 훔치고 나서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쯤 공판이 끝났을 텐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평소보다 톤을 높인 변호사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예상한대로 기각됐어요. 역시 아직은 쉽지 않네요. 항소하려면 이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제하는 위자료를 원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조정도 무용했다. 변호사의 말을 남의 얘기처럼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묘희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잘...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서구 선진국들처럼 결혼 파탄 여부가 이혼 조건이 되려면 책임에 대한 사회 전반의 가치가 바뀌어야 할 텐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거 같아요. 그래도 결국 역사는 책임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겠어요?
변호사는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인용한 판례가 간혹 있긴 하다며 말을 이어 갔다.
혼인 지속 의사가 없으면서 마음을 숨기고 보복을 목적으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죠. 이번에 남편측이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신경 써서 대응한 거 같아요. 피고 측이 제출한 마지막 준비서면을 보니 장모님 허리 아프다고 실버카도 사드렸던데 모르셨어요? 원고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상당히 제시했고요. 아직도 매장 일을 도와주고 있다던데 이런 경우 부부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기 힘들거든요. 피고의 저의를 밝힐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항소도
해 볼만 한데 쉬운 일이 아니죠. 남편 분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길도 없고요.
보복이라는 말에 놀란 묘희의 가슴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사람, 자주 노래를 보내긴 했어요.
변호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혼인 지속의사를 보이기 위해 제일 흔하게 쓰는 방법이죠. 저도 이혼을 원치 않는 의뢰인에게 편지를 쓰거나 노래를 보내라고 조언하곤 하니까요.
선택이 아니었다.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재앙처럼 그것이 닥쳐왔을 뿐. 율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돌고 또 돌아온 그 모든 길 끝에 율이 서 있었다. 항소에 대해 며칠 더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자마자 딩동 메시지 알림 음이 울렸다. 제하였다. 링크된 유튜브 동영상을 열자 귀에 익은 남자 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
*

묘희의 가슴 속으로 조급한 불안이 새벽안개처럼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언질조차 없이 인생이 저 혼자 짜놓은 계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묘희는 알지 못했다. 되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제하에게서도, 율에게서도 돌아서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묘희는 벤치에서 일어나 책을 챙겨들고 상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부동산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 소장에게 부탁했다.
저기요. 전기 드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커튼을 좀 달려고요.
묘희는 해가 들지 않는 북쪽 창에 하얀 레이스 커튼을 달고 싶었다. 하지만 콘크리트 벽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혼자 달 방법이 없어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는데 왠지 지금 당장 그 커튼을 달고야 말겠다는 조바심이 밀려왔던 것이다. 컵라면으로 이른 저녁을 때우고 있던 소장은 묘희를 알아보고 웃으며 일어섰다. 서류철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휴대용 드릴을 챙겨들고 물었다.
전기 드릴
써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거든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가요.
소장은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가뿐하게 식탁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드르륵 드르륵 콘크리트 벽에 제법 긴 나사못을 박아 넣었다. 갈색 커튼 봉을 걸어주고 의자에서 내려서는 소장을 향해 묘희가 말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다음에요. 좀 있다가 집 보러 오기로 한 손님이 있어서요.
묘희는 얼른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뽑아서 공구를 챙겨 일어서는 소장에게 건넸다.
소장은 표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이 시인 좋아하는 거.
묘희는 싱긋 웃으며 같은 시집을 들어보였다.
소장을 따라 나선 묘희는 집 앞에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소장은 불쑥 손을 내밀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죠.
엉겁결에 마주 잡은 소장의 손이 따뜻했다.
소장을 배웅하고 돌아서던 묘희는 놀이터로 걸어갔다. 길고양이들도 돌아간 호젓한 놀이터 위로 파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묘희는 가느다란
그네 줄에 기대고 앉아 시집을 펼쳐 들었다. 검은 활자 위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가난한 마을에 내리는 은총 같았다.


/이은정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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