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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스치고 간 추억의 시편들·1

‘꽃등’을 달아 놓은
것과 같이 화사한
연분홍 빛깔의 ‘복사
꽃’과, 아직도 그 꽃
그늘 사이에서 ‘한들
거리고 있을 것 같은
새가 ‘앉았다 떠난
그 자리’의 여운을
찾아 나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0년 08월 02일
ⓒ e-전라매일
중학교 1-2학년 시절, 따뜻한 봄날이면, 나는 우리 마을 뒷동산엘 자주 오르곤 하였다. 청솔가지에 물이 오르고 산꿩이 한가롭게 우는 양지바른 언덕에서 들녘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자운영꽃들이 만발한 들녁에선 벌떼들이 잉잉거리고, 그 사이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간간이 전라선을 달리는 기차의 기적, 멀리 신작로를 따라 장(場: 남원)을 보러 가는 장꾼들의 긴 행렬, 이런 풍경 속에서 아버지의 병고로 가세가 기울어, 나는 어둡고 외로운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뒷동산에서 즐겨 읊던 시가 있었다.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며 /또 나의 얼굴을 스쳐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 나는 알겠다.

등성이에 누워 이렇게 눈 감으면 /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 이 호막한 천지를 배경하고 / 나의 모나리자 / 그러나 어찌 어디에도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 오리 풀잎이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 네 말을 나는 오늘 정녕 알겠다.
- 유치환 , 「바람에게」 전문

이 시로 인해 나는 시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중 2땐가 문예부 시간에 윤주순 선생님께서 읊어 주셨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당시에 유행했던 우울한 연가풍의 소월 시, 이처럼 뭔가 애달프고, 안타깝고, 간절한 정서가 어두운 집안 분위기와 어울려 울적한 사춘기의 나를 달래주곤 하였다. 삶이 고달플 때마다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 Over the Mountain> 시를 곧잘 읊조리며 허기진 영혼을 달래곤 하였다.

산 너머 저쪽 하늘도 멀리 / 행복이 있다고 남들이 말하기에 / 아, 나도 남들을 따라 갔다가 /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 산 너머 저쪽 하늘도 멀리 / 행복이 있다고 남들이 말하기에
- 칼 붓세(Busse, Karl: 1872-1928, 獨)

가다가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오더라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다림, 그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비록 그것이 현실과는 다른, 어쩌면 청마 유치환이 「깃발」에서 찾고 있는 ‘저 푸른 해원(Over the Sea)’과도 같이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었다.
‘산 너머 저쪽’,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인간 본원의 그리움이요, 허무의 실존 인식 속에서도 이데아를 꿈꾸는 세계이기도 하다. 나는 이처럼 해소할 수 없는 갈망을 늘 품고 어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유치환의 시 「춘신」의 ‘앉았다 떠난 그 자리’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유치환, 「춘신春信」 전문, 1947.

중학교 1-2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을 지내다 봄이 되어 창가로 날아와 지저귀다 날아간 멧새를 그리워하고 있다. ‘꽃등’을 달아 놓은 것과 같이 화사한 연분홍 빛깔의 ‘복사꽃’과, 아직도 그 꽃그늘 사이에서 ‘한들거리고 있을 것 같은 새가 ‘앉았다 떠난 그 자리’의 여운을 찾아 나는 아직도 시를 쓰고 있다.

/김동수 시인
본지 독자권익위원회 회장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0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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