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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을 디자인하다(1-7)] 오늘이 며칠이죠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3년 12월 05일
ⓒ e-전라매일
상담사가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질문이라기에는 너무도 일상적인 물음이었는데 꿈속에서 허방다리를 짚었을 때처럼 아찔했다. 긴장감이 한순간에 정수리 부분으로 쏠렸다. ‘그래, 오늘이 며칠이지?’ 자문해 보았다. 9월은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 날짜는 짙은 안개에 갇힌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한 번씩 ‘내 나이가 몇이지?’라고 놀란 적이 있었던 기억까지 겹치면서 ‘이거 심각한 증상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해진 직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각을 다투는 일도 없는 생활이 쌓이다 보니 그날이 그날인 삶, 굳이 날짜나 나이 같은 걸 기억하지 않아도 별 지장 없이 흘러가 주는 일상.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나날을 보내는 동안 마음속에 무사안일이 싹텄을까. 그깟 숫자 몇 개 기억하지 않아도 뭐 그럭저럭 지냈으니.
하지만 예상이 깨지고 그깟 숫자를 당면 문제로 맞닥뜨려 즉시 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나는 상담사의 눈빛에 초점을 맞추며 몇 가지를 빠르게 유추했다. 그리고 퍼즐을 맞춰나갔다.
아침 일찍 메일을 열었다. ‘행복한 경영 이야기’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라는 문구를 읽었다. 오늘 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오늘이 며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메일 ‘詩 읽는 CEO’에서 고두현 시인이 띄우는 시 한 편을 음미했다. 허영자의 「완행열차」였다. 詩 읽는 CEO는 매주 금요일에 배달된다. 그렇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내친김에 시 한 편을 되뇌어 본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 허영자, 「완행열차」

날짜는 계속 오리무중이었다. 인생의 급행열차를 놓쳐 버린 시점에서 완행열차까지 놓칠까 싶은 조바심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집을 나오기 전에 훑었던 인터넷 뉴스를 따라가 보았다. “김웅 압수수색에 野 격앙…. ‘고발 사주’ 정국 파장 확산” 등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또 KBS 뉴스에서 방영한 9·11 테러 영상들이 스쳤다. 사건은 20년이 지났어도 미결 상태이며 아직도 희생자 1000여 명의 신원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내용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다면 오늘이 9월 11일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9·11 관련 뉴스는 당일뿐 아니라 전후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무슨 대답이든 빨리해야 할 것 같은 성급함이 불쑥 뛰쳐나갔다. “11일인가요?” 상담사가 표정을 살짝 바꾸는가 싶더니 질문을 돌렸다. “그럼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금요일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이제 다시 날짜를 떠올려 보세요.” “13일인가?” 어떤 세포 하나가 딱하다는 듯 속삭였다. 그때 또 다른 세포가 외쳤다. “아니야, 13일은 월요일이야. 치과 예약 메시지가 왔었잖아?” “월요일이 13일이면?” 상담사가 추산해 보라는 듯 시선을 비켰다.
다급해진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거꾸로 헤아렸다. 그깟 날짜를 모른다는 부끄러움이 손가락 끝에서 떨고 있었다. 입 밖으로 13, 12, 11, 10을 소리냈고 속으로는 월, 일, 토, 금을 대입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 오늘은 9월 10일입니다.”
언젠가 보건소로부터 치매 예방을 위한 홍보 우편물이 날아왔다. 마치 독촉받은 느낌이어서 선뜻 응하고 싶지 않았다. 무료 검사라 하니 왠지 성의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음도 부인하지 않겠다. 또 보건소 같은 곳에서 쓰는 “어르신,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입에 발린 말 같고 듣기에도 거북했다. 하지만 초고령 사회의 길목에서 치매 문제가 이슈로 등장한 지 오래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일말의 압박감에 마음이 동요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사태를 맞기 전에 큰마음을 먹었다.
가을 햇빛이 따갑게 퍼지기 시작하는 9월 10일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보건소 안에 마련된 치매안심센터를 방문했다. 검사장에는 조그만 방이 세 개 있었다. 하나는 중앙 공동사무실이었고 그 좌우로 개별 검사실이 있었으며 두 명의 젊은 상담사가 대기 중이었다. 신원에 대한 간단한 질문을 하면서 학력 사항을 묻는 게 특이했다. 인지기능을 파악하는 데 개인차를 고려하는가 싶었다. 나를 담당한 상담사는 긴 머리를 뒤로 느슨하게 묶었고 체격이 큰 여성이었다. 상담을 진행하는 태도가 때로는 사무적이고 때로는 전문적이었다.
훅 들어왔던 날짜 맞히기 고비를 넘긴 후에 다른 검사를 시작했다. 질문자가 숫자를 네 개씩 먼저 말하면 내가 이어서 답했다. 그게 끝나자 이제는 숫자와 계절을 교대로 댈 차례였다. 이를테면 “1, 봄, 2, 여름, 3, 가을….” 하고 이어가는 식이었다.
그다음엔 몇 개의 도형을 제시하고 그려 보라 했다. 다음 순서는 도형을 차례로 나열하는 것이었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또 동그라미, 세모, 네모 이런 식이었다. 도형 문제가 끝난 후에는 문장 따라 하기 과정이었다. “민수는/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가서/ 11시에/ 야구를 했다.” 어절의 순서를 기억하려고 하니 긴장되었지만, ‘평소 글쓰기를 통해 문장 연습을 했던 게 도움 되었나?’ 싶어 속없이 우쭐해지기도 했다. 제시된 단어의 철자 거꾸로 나열도 있었는데 ‘금수강산’을 산, 강, 수, 금으로 뒤집으면 되었다.
마지막 순서는 좋아하거나 아는 과일과 채소 이름을 대는 거였다. “복숭아, 포도, 사과, 배, 감, 살구, 자두, 키위…” “배추, 무, 상추, 쑥갓, 열무, 시금치, 파, 마늘….”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필두로 상담사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주워섬겼다.
이번에 한 테스트는 그야말로 기초적이었다. 오늘 날짜를 물었을 때 답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것 말고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선별 검사를 진행하면서 깨달았다. 결국, 치매란 누가 “오늘이 며칠이죠?”라고 물었을 때 답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황망함이었다.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 당연한 걸 까맣게 잊어가는 일이었다. 마치 초록색 잎사귀에서 초록 색소가 빠져나가 단풍이 되었다가 낙엽이 되는 거처럼….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뇌 속에서 기억의 색소가 날아가 버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기 전에 사소한 것일지라도 일부러 지우거나 무심하게 대해서는 안 되겠다. 살아 있는 한 삶을 위한 절차탁마는 계속해야 한다는 절실함을 느꼈다.
검사가 끝나자 상담사는 결과지에 파란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정상이라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이 있었다. “인지기능이 정상 수준입니다. 건강한 인지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소에 치매 예방수칙 준수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 관리를 잘하고, 정기적으로 치매 조기 검진을 하기 바랍니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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