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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날들의 초상肖像(2-9)] 어떤 지름신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5월 29일
외출에서 돌아왔더니 뜬금없는 일이 생겼다. 남편이 홈쇼핑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웠단다. 낚아 올린 것은 생물 갑오징어였다. 미끼는 오만 원 상당의 현금이었다. 직접 보고 샀어도 어려울 오징어를 영상만 보고 결재했다니 고개가 갸웃해졌다. 웬일이냐고 묻자 혼자 있기 심심해서 영화나 한 편 보려고 TV 채널을 돌렸다고. 이리저리 옮기다가 갑오징어를 판매하는 화면에 시선이 꽂혔다.
지금쯤 싱싱한 갑오징어가 먹물을 쏘아 댈 서해 풍경이 겹쳤다. 날것은 날것대로 익힌 것은 익힌 대로 미각을 돋워주던 기억이 파도쳤다. 앞뒤 가릴 틈도 없이 “그래, 이건 사야 돼.” 지름神이 내렸다. 호스트의 맛깔나는 진행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잘 손질해서 포장한 개수가 10개나 된다니 값도 싸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불확실성의 사회적 거리 두기 계절에 오징어 먹으러 외유를 떠나는 건 무리수였다.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가 도착 즉시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만 찍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에 오징어가 오락가락 헤엄쳐 다녔다.
갑오징어, 가슴에 뼈를 품고 사는 오징어다. 그 뼈가 마치 갑옷 같다고 갑옷 갑甲자를 붙였다. 원래 조상은 조개였다. 분화되는 과정에 조개껍데기가 모두 퇴화하지 않고 몸속에 남았다. 물론 척추동물의 뼈와는 다르다. 하지만 덕분에 연체동물임에도 뼈대 있는 가문인 셈이다. 그 뼈가 인간의 마음속 화병 같은 응어리가 아닌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기록을 보면 상당히 영리한 물고기다. 오적烏賊(까마귀를 해치는 도적)어라고도 하는데 『자산어보』에 따르면 갑오징어는 까마귀를 잡아먹으려 매일 물위에 떠 있다. 날아가던 까마귀는 물에 떠 있는 오징어가 죽은 줄 알고 잡아먹으려 쪼아댄다. 그 순간 오징어가 까마귀를 덮쳐 잡아먹는다. 『전어지』에는 흑어 라고도 했는데 이는 쓸개와 피의 색이 먹처럼 새까만 데서 비롯하였다. 사람이나 큰 고기를 보면 먹물을 순식간에 사방으로 내뿜어 스스로 몸을 숨긴다.
또 짝짓기할 때는 변장술에 유인술까지 획책한다. 암컷은 훌륭한 2세를 위해 본능적으로 덩치 큰 수컷을 좋아한다. 그래서 체구가 작은 수컷은 짝짓기가 쉽지 않아 몸의 색깔을 암컷처럼 바꾸는 자구책을 쓴다. 그런 다음 몸집이 큰 수컷에 접근한다. 암컷인양 얼쩡거리다가 큰 수컷 옆의 암컷 오징어를 유인한다. 함께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목적을 달성한다. 키 작은 갑오징어가 카멜레온 같은 변장술을 통해 사랑을 쟁취했다고 할까? 아니면 원초적 본능이라 해야 할지.
남편이 주문한 갑오징어가 기대만큼 괜찮을지는 미심쩍었다. 하지만 어떤 맘으로 질렀을지는 짐작되었다. 우리는 갑오징어에 대한 거부감 없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맛과 식감뿐 아니라 계절과 장소, 함께했던 지인들과의 정감까지도 오롯하다. 맛은 비리지 않고 순하면서 은은한 단맛까지 난다. 타우린 함량도 높아 영양식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도톰하고 오돌오돌 씹히는 감을 느끼며 해묵은 일상을 서로 나누면 또 다른 에너지가 솟았다. 회로 먹거나 찜을 찌거나 데쳐도, 삶거나 끓여도 매력이 있다. 반건조나 바짝 말린 건어물로 취해도 일품이었다.
그런저런 전례가 남편을 움직였을 거였다. 또 출출할 때 친구들과 찾았던 경원동 가맥집의 마른 갑오징어 안주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오래전부터 전주에 찾아오는 여행객들의 명소가 된 이 집은 뻣뻣할 정도로 마른오징어를 모터가 달린 전용 망치로 잘 두드려 다스린 다음 연탄불에 구워준다. 단, 짠, 고소한 간장소스에 찍으면 비주류인 사람도 맥주잔을 들게 하는 맛이다. 오장육부가 놀랄 만큼 시원한 맥주에 곁들이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갑오징어 한 마리로 맥주 한 상자도 거뜬할 것이다. 하악관절이 아프도록 깨물어도 끝까지 당기는 게 마른 갑오징어다.
홍지서림 앞 수제 맥주 전문점의 피데기 안주도 한몫했을 수 있다. 그곳은 적당히 말린 갑오징어 살을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준다. 예약 주문이 필요했는데 담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선사했다. 이 가게의 남자 주인장은 몇 종류의 향이 다른 맥주를 빚었다. 아내는 홀을 담당한다. 굽슬굽슬한 긴 머리에 후리후리하게 큰 키의 마담이었다. 홀 안은 세미 클래식 음악 외에 각종 추억의 곡들이 분위기를 돋웠다.
주문한 택배는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스티로폼 상자의 외장이 그럴싸하였다. 그 안에 낱개로 된 비닐 포장이 질서정연하게 담겨 있었고 이불처럼 보냉재를 깔끔하게 얹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환경을 위협하는 물질들로 잔뜩이었지만, 일단은 정갈하고 반반했다. 언제 도착할까? 날것인데 신선하게 배달될까? 조바심 내던 남편은 좋은 세상이라며 반색했다. 방방한 부피감에 모처럼의 자기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듯 으쓱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기대 반 궁금증 반으로 포장 한 개를 뜯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받침에 흡수지가 깔렸고 그 위에 갑오징어가 얹혔다. 몸통 예닐곱 개를 엇비슷하게 겹쳐서 뉘었다. 흡사 다리미로 누른 듯 납작했다. 아니면 얇게 저며서 포를 뜬 것 같기도 했다. 꼴뚜기보다 조금 큰 것부터 아기 손바닥 크기를 차례로 배열했고 실낱같은 다리를 가지런히 놓았다. 뽀얗고 오동통한 살집의 상태를 기대했는데 백지장같이 얇고 파리했다. 호스트의 화려한 진행과 영상이라는 한계에 유린당한 것 같았다. 그보다 최신 쇼핑문화에 민첩하지 못했음에 아차 싶었다. 마릿수와 포장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적어도 크기까지도 확인했어야 했다. 결국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오징어의 남획에 동참한 꼴이 되었다.
모처럼 가족들과 홈캉스라도 해 보겠다고 안 하던 짓을 한 남편은 실망했다. “바로 이것.”이라고 설레서 드리웠던 낚싯대에 해파리나 불가사리가 걸렸을 때 같은 표정이 되었다. 결국 변산반도 어디쯤에서 솔섬으로 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갑오징어를 먹었던 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향기로운 술 한 잔을 서로 권하며 좋은 사람들과 한때를 떠올리며 답답한 현실을 상쇄해 볼 요량이었을 남편의 마음만 가상하였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충동적인 구매 욕구에 현명하게 대처할 숙제 하나를 얻었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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