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신작로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06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50주년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우리나라 산업과 경제,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된 50년 역사를 회자하고 칭송하였다. 물론 어떤 일에나 따라다니는 이전투구 기사도 들끓었다. 추풍령휴게소 어디쯤 세운 준공 50주년 기념비에 누구의 이름은 새겼고 어떤 이의 이름은 빠졌다라는 그 설왕설래가 따분하여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엉뚱한 길 하나를 찾아내었다. 고속도로 전신이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의 자동찻길로 접어들었다. 아득히 먼 고향에도 신작로라 불리는 찻길이 있었다. 그것은 내 글쓰기의 첫 제목이기도 했다. 잊었다고 여겼던 글쓰기의 열망이 돋아났을 때 한 지인에게 심정을 내비쳤다. 그이는 “다 늙어서 글은 써서 뭐 할거여? 골치만 아프제.”라고 되받았다. 그렇기는 하였다. 글쓰기와 무관하게 살아온 날들이 얼마인데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짓인가. 여러 번 생각해도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내면 깊은 곳에서 생동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결국 쓸데없이 골치 아픈 짓 하지 말라던 이는 눈을 가늘게 흘기며 애정 어린 일갈을 날렸다. “미쳤구먼.”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2학기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 같다. 학교에 해 갈 숙제를 놓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숙제는 글쓰기였다. 제목은 ‘신작로新作路’였는데 운문이나 산문을 써야 했다. 원고지에 적는 것까지는 떠올랐지만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여름밤 풍뎅이가 자반뒤집기하듯 방바닥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갈등하였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담임선생님 모습이 떠올랐다. 보통의 키에 얼굴은 동그스름했다. 뒤로 빗어넘겨 한 갈래로 묶은 고수머리가 강한 인상일 수 있었는데 실상은 푸근한 성격이었다. 머리카락이 선천적으로 곱슬하면 품성이 세다는 건 편견에 불과했나 보다. 기품있는 자세에 말소리는 조용조용했고 옅게 화장한 이미지는 세련미 그 자체였다.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인품의 삼십 대 후반쯤이었다. 이름 또한 김안순이었다. 이런 선생님의 당부를 거스르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글감을 다시 집어 들고 버스가 지나다니던 길을 연상해 보았다. 우리 고장의 편도 일차선 찻길은 싸리재와 곰티재를 넘어 전주로 오가던 길이었다. 그 길은 읍내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비행기재를 통해 남원이나 전주로 갈 수 있었다. 첩첩산중을 벗어나는 출입구였다. 멀리 산길을 넘어가는 빨간색 시외버스가 바라보이면 막연하게나마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음에 설렜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 길을 한 번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태를 글로 쓴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숙제는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온 후 해결되었다. “신작로는 도시에 사는 언니의 선물을 싣고 오고 (…) 내 꿈은 신작로를 따라 달린다.”라는 내용의 산문이었다. 거의 아버지가 불러준 대로 쓴 것 같다. 완성했다는 안도감이 있기도 했지만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학의 허구성 같은 것을 알 턱이 없던 어린 마음에 거짓말이 섞여 있던 것이 못내 켕겼다. 내게는 도시에 사는 언니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꿈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찜찜한 켕김에 반전이 일어났다. 스스로 완결한 글이 아니라는 것쯤 알았겠지만, 어느 부분 격려할 곳이 있었을까?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친구들 앞에서 낭독으로 발표했고 반 대표로 뽑혀 상도 받았다. 뭔지도 모르면서 문예반에 속하게 되었다. 차츰 글쓰기가 취미와 특기로 부상하였다. 6학년 졸업 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두 명의 문예반 선생님도 만났다. 그리고 신작로로 달리고 싶은 꿈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글을 쓰고 싶다는. 그러나 그것은 거기까지였다. 변명 같지만, 중등학교 때는 지도 교사를 만날 수도 글을 쓸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의지는 있었다고 하나 표현하거나 지속하지 못하였다. 심적인 여력이며 환경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 삼십여 년 중등학교 음악 교사로 지냈다 했더니 동창 중의 어떤 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렸을 적 나를 회상하였던지 “교사를 했어도 국어 교사를 했어야지.”라며 의아해했다. 초등학교 때 문예반이었다고 국어 교사여야 한다는 발상이 뒷머리를 긁적이게 하였지만 잊고 있었던 아킬레스건 같은 것을 툭 건드리기도 했다. 돌아와서 명경지수의 심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눈팔듯 살아온 세상에는 고속도로가 신경세포처럼 산지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더구나 가상의 공간까지 온통 광통신 연결망으로 휘황한데 내 기억 속의 신작로는 아직도 비 온 날 지렁이 지나간 자국같이 초라했다. 길바닥은 울퉁불퉁했고 흙먼지 날리는 좁은 길은 덜커덩거렸다. 산을 깎거나 비탈진 곳에는 연례행사로 산사태가 났다. 진흙 길은 파여서 웅덩이가 생겼고 차가 지나가면 흙탕물을 튀기거나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글 제목으로 신작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오랜 세월 가라앉아 잠든 씨앗처럼 머물다 다시 깨어났을까?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서문이 그 몽상의 씨앗을 호명했을지 모르겠다. “임오년 여름에 비가 줄곧 달포를 내려 들어앉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벼루를 들고 나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벼룻물을 하여, 친구들 사이에 오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인 다음, 생각나는 대로 그 편지 뒷면에 적고서 끝에다 역옹패설이라고 썼다.”라는 대목이 나의 무의식을 흔들어 깨웠을까. 그래, 내 인생에 떨어진 희로애락의 빗물로 먹을 갈아보리라. 초등학교 동창이 말했던 국어 교사는 못 되었지만, 세상에 번듯한 고속도로를 50주년 이상 마음껏 주행할 수는 없었어도 오솔길이나마 내 길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길라잡이해 준 신작로가 아니라 남은 세월 스스로 갈고 닦는 내 영혼의 신작로를.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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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08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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