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유산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12일
습관처럼 앉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온다. 마려운 걸 한 시간 남짓 참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차를 세우고 길가 후미 진 풀숲에 들어 실례를 할까, 아니면 급한 대로 비닐봉지의 도 움을 받을까, 망설이며 참고 참았던 소변이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이다. 배설 후 부르르 떨리는 허망한 행복(?)을 느끼며 한 방울의 소변까지 남김없이 변기에 쏟아낸다. 이 졸작을 써 내려가다가 엉뚱한 서설 같으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수필의 도입 문장으로 쓰인 “습관처럼 앉는다.”가 그것인데, 이 문장대로라면 필자를 여성쯤으로 생각할 것 같아서다. 더군다나 ‘배귀선’이라는 이름은 여성의 이름에 가 까우니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키가 1미터 80 센티미터에 몸무게 78킬로그램인 그런대로 건강한 남자다. 문득〈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라는 시를 쓴 유홍준 시인이 생각난다. 이 시편의 화자는 남자다. 그런데 나처럼 앉아서 소 변을 눈다. 남자의 자존심을 버린 화자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 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지청구 때문이다. 대개 가정에 있는 변기는 소변과 대변을 함께 처리하는 양변 기다. 서서 오줌을 누고 마지막을 털어내는 남성의 각도에 따라 오줌이 흩뿌려지기도 하고, 요도에 남아 있는 잔뇨가 채신머리 없이 비실비실 기어나와 변기 언저리나 욕실 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서서 소변을 눌 때마다 잔여 방울의 지린내가 화장 실에 가득하니 아내인들 어찌 타박하지 않으랴. 그렇든 저렇든 나는 소변을 바닥에 흘려도 눈을 흘기거나 지 청구를 해댈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앉아서 누는 자세를 취한다. 이 수필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라면 내가 거동이 불편할 만 큼 늙었거나 아니면 게이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 리를 보낼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앉아서 소변을 볼 만큼 그리 늙지도 그렇다고 동성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다. 나도 예전에는 다른 남자들처럼 서서 싸는 자세를 취했었다. 한때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양변기에 구멍을 더 낼 것처럼 갈겨 댄 적도 있었고, 부러 화장실 문을 빼꼼히 열어놓고 은근히 폭 포 소리를 자랑삼기도 했다. 그보다 더 젊은 한창나이에는 동네 흙담에 굵은 오줌 줄기를 능구렁이처럼 척 걸쳐 놓는 기염을 토 하기도 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비밀 하나 더 털어놓자면, 시망 스러운 친구들과 ‘오줌 멀리 보내기 시합’에서 당당히 일등을 해 공짜 술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그랬던 내가 요샌 날 이렇게 앉 아서 오줌을 누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어언 10여 년이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이 없는 아버지의 소변은 변기 앞에서 당신의 허벅지를 타 고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몇 방울은 그래도 적체된 압력 때 문에 가까스로 변기에 떨어지지만 이어지는 오줌은 포물선을 상실한 채 변기 언저리와 욕실 바닥을 적시곤 했다. 대개의 남 성은 소변을 눌 때 한 손으로 거시기를 잡아 변기 중앙을 조준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여 그렇지 못했다. 치매를 앓 는 중에도 부끄러움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아들의 도움을 밀쳐 내곤 했다. 한 손은 중심을 더듬어 벽에 기대고 다른 한 손은 구부정한 허리를 받치려 양변기 물통에 의지했다. 오줌발도 약하 지만 조준할 손이 부족한 상황이니 소변이 속옷과 바지를 타고 화장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상황 을 타개할 방책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앉아서 소변 눌 것을 간청 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 대목에서 또 한 사람의 시인이 떠오른다. 황정산 시인이다. 황 시인도 유홍준 시인의 시와 똑같은 제목의 시를 썼다. 생리 적 현상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유홍준의 시편에 비해 황정산의 시편은 정반대의 의도를 이미지화하고 있다. 예컨대 “고조할아 버지의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오래된 습속의 불변을 이 야기한다. “핏속에 들어 있는 단 한 방울의 기억 때문에라도” 남 자로서 절대 앉아서 쌀 수 없다는 결연함을 시편을 통해 강조한 다. 황정산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꿋꿋한 의지는 어 쩌면 아버지의 고집과 닮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아버지는 희미해져 가는 자존심을 꺾 었다. 결국 앉아서 소변을 누게 된 것이다. 내가 변기에 앉아서 오줌 누는 시범을 보인지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날 무렵 아버지는 나를 따라서 엉덩이를 드러내 놓고 변기에 앉으셨다. 그날 이후 변기에 여성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짠하기도 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아버지의 기억 속 자존감은 그렇게 깊은 치매와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 다. 내가 좀 편하겠다고 치매 든 아버지께 앉아서 오줌 눌 것을 강요했었음을, 아버지 돌아가신 지 오래된 지금 이 수필을 통해 고백한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소변을 누는 것 에 익숙해졌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쩌다 외지에 나가거나 일 행과 함께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 서면 어색함 때문인 지 오줌이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전립선 문제가 불거질 나이 가 되기는 했지만 앉아서 소변을 눌 때가 서서 쌀 때보다 편하 고 좋다. 오늘도 그 습관 때문에 모처에서 부안의 거처까지 한 시간 남짓을 참고 왔으니 오줌보가 어찌 수난을 당하지 않았으 랴.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때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서려고도 했 지만 습관 때문에 지금껏 앉아 누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 니까 지금의 내 여성스러운 소변 자세는 유홍준 시인이나 황정 산 시인의 시적 논리와는 거리가 먼 순전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황정산 시인의 시 속 화자인 남자의 전통적 용변 자세에 대한 주장이든 유홍준 시인의 시에서처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앉아서 싸는 자세를 취하든, 각자 신념에 따라 편한 자 세를 취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수필을 빌려 내 경험을 말한 다면 서서 싸는 것보다 느긋하게 앉아서 싸는 게 훨씬 편하다. 더 좋은 것은 헛방질하여 냄새나게 할 일 없고 아내들의 지청구 또한 들을 일 없으리니,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양변기에서 일어선다. 바지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 있다. 문 득, 쭈글쭈글한 아버지의 엉덩이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닮아가 는 내 거무튀튀한 엉덩이에 인제 그만 바지를 추켜올려 주어야 겠다.
/배귀선 (시인)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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