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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나 홀로 악사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13일
표고 132m 정상에 다다른다. 높이만 보면 이게 산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어우러진 숲의 품새가 산은 산이다. 꼭대기를 찍고 고만고만한 높이의 능선길을 걷는다. 15분 정도를 걷노라면 노송나무가 빽빽한 골짜기쯤을 통과한다. 내리닫는 계곡 쪽을 향해 나무 벤치 몇 개가 놓였다. 그 벤치에서 기타를 끼고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계곡 아래로 곧 거꾸러질 듯 구부정한 뒤태와 거무스름한 옆 얼굴이 얼비쳤는데 중장년은 넘었지 싶었다. 그곳은 피톤치드 생성 구간이니 잠시 삼림욕이라도 하고 가라고 손짓하는 듯한 지점이기도 했다.
벤치의 남자는 인생 후반에 함께할 악기로 기타를 선택했는지 스스로 반주하면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울창한 노송 숲을 관객 삼은 듯 나름 심취해 보였다. 그런데 그의 연주를 귀기울여보니 기타 소리가 한 타령이었다. 한참 지나쳐서 다시 들어보아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였다. 재즈 기타로 긁어대는 것 같은데 코드에 변화가 없었다. “팅 티르르 팅 티르르.” 기타가 타악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노랫소리를 들었던 산의 이름은 화산華山인데 화산체육공원華山體育公園이라고도 부른다. 완산칠봉을 길 하나 사이에 둔 동남쪽 기슭으로 전주천의 흐름과 방향이 같다. 노래하는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는 화산이 품고 있는 유연대油然臺 즈음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는 유연油然을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음. 생각 따위가 저절로 일어나는 형세가 왕성함.”이라고 풀이했다. 그 말마따나 이곳은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듯 형성된 한 덩어리의 큰 숲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도심에 떠 있는 섬 같기도 하고, 강물에 떠다니는 돛단배 형상도 닮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내게도 글쓰기의 기세가 뭉게뭉게 피어날까 솔깃해지기도 한다.
남자의 노래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2절을 지나고 있었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3절까지도 거뜬히 내달릴 지경이었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부분은 나라 잃은 한을 표현했다고 들었다. 1935년 발표 당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고자 ‘삼백련 원앙 풍’으로 묘하게 바꿔 불렀다라는 일화가 남아 있는 대목이다.
고요한 숲속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고 의아해하는 시선은 아예 등진 채 노래하는 나 홀로 악사. 이 용감한 남자를 보며 쓸데없는 상념들이 뭉게구름처럼 쌓였다. 남의 이목 따위가 아랑곳없는 저 가객은 무슨 한이 저렇게 절절할까? 개인적일 수도, 아니면 나라와 민족의 한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거나 혹시 노래를 잘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연습 중일까. 또는 최근에 새롭게 떠오르는 트로트 열풍에 젖어서 열중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기타 반주는 또 뭐란 말인가. 가까운 문화센터 같은 데서 두어 번이라도 배우기는 했을까. 또는 한 개의 코드라도 기억하고 싶어서 반복 연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흥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손아귀에 딱 맞는 탬버린을 택할 수 있었을 텐데. 손목에 적당한 스냅을 주며 엉덩이 쪽이나 허벅지쯤에 한 번씩 튕겨주거나 동서남북 위아래로 흔들었더라면 보는 사람이 훨씬 더 재미있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남자의 외연은 매우 진지함 그 자체였다.
악사가 부른 ‘목포의 눈물’은 어린 시절 외삼촌의 전축에서 흘러나와 나도 저절로 익힌 곡이었다.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는데 어느새 밀고 당기고, 꺾고, 떠는 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어린애가 가요를 부르는 것이 미덕은 아닌 때여서 큰 소리로 불러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학습의 효과였을지 아이러니하게도 어른이 되어서까지 기억에 남았고 나에게 이 노래는 대중가요 중 애창곡이 되었다. 지금도 이 곡을 듣거나 부를 때면 아련한 그리움과 향수가 먼저 달려온다.
노송나무 아래 남자도 나의 애창곡에 심취하고 있었는데 그의 불규칙한 비브라토는 기교라기보다 불안했다. 한참을 멀어졌음에도 남자의 노랫소리는 귀가에 ‘앵앵’ 댔다. 어디가 좀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하다가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그럴 것만도 아니었다. 글을 쓰겠다고 혼자 터덕거리다가 생활 글쓰기 반을 운영하는 곳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삶에서 발견한 소재로 소소한 글쓰기나마 시도해보자는 의도였다. 그런 점에서 생활 글쓰기라는 용어가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그 끌림에 이끌려 먼 거리였지만 한 달에 두 번씩 재미있게 참여했다. 수업은 합평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평가는 서로의 글을 읽고 덕담을 나누는 정도였다. 간식이나 차를 나누면서 친목도 도모할 수 있었고 몇 편의 초고도 생겼다. 그런데 한 2, 3년 진행되다가 주최 측 사정으로 폐강되었다. 다시 외톨이가 되었는데 그때 나 홀로 글쓰기는 숲속 악사가 코드 1개를 긁으며 불규칙한 비브라토의 열정으로 자족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서울디지털대학교에 편입하였다. 강의를 들으며 그간의 내 사고가 얼마나 안일하고 소극적이었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글을 쓰는 일은 소재가 무엇이든 주제가 어떻든 장르가 어떤 것이든 치열한 자기 성찰의 수반임을 깨달았다. 궁극적으로 글은 혼자 쓰는 작업이지만 막연한 도전은 아름다운 숲길을 등불 없이 걷는 것 같았다. 기타를 타악기로 둔갑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산행의 반환점은 유연대의 한쪽 끝 어은터널 부근이다.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 준비해 간 물을 마시며 하늘을 보았다. 에워싸인 나뭇잎 사이로 동그란 하늘이 드러났다. 마치 거꾸로 파놓은 우물 같았다. 정화수처럼 한 움큼 떠다가 코로나19를 퇴치해 달라고 빌어볼까? 턱없이 유치한 상상을 하다가 자리를 떴다.
다시 노송나무 숲 근처에 이르렀다. 또 다른 행인 남자가 숲속 악사와 밀착하여 대화하고 있었다.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는데 내가 이상히 여겼던 기타 반주의 ‘목포의 눈물’을 듣고 질문했을지 궁금했다. 곁을 지나며 들어보니 두 남자는 하모니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 홀로 악사가 하모니카를 코로 분다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따라오는 하모니카 가락은 기타 반주의 노래보다 들을 만했다.
집에 돌아와서 하모니카 연주가 코로 가능한지 시험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그것보다는 유튜브에서 나의 애창곡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잠시 어린 날의 추억 속을 들여다보다가 유연대에서 만난 남자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지금이라도 기타를 제대로 익히면 훨씬 더 멋있는 악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권해 볼걸 그랬나 아쉬웠다. 물론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걸 자인하면서 글을 쓰다가 지치거나 권태로워질 때 숲속 나 홀로 악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보리라.

/김숙 (전) 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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