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조 선생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9월 11일
누군가가 물었더란다. “커서 뭐 될래?” “저요? 조 선생 될래요.” “아야, 김 씨가 어찌 조 선생이 된다냐? 너는 김 씨니까 김 선생이 되어야지.”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을까? 덕분에 좌중들은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몇 해 전 가을날 고향에 갔을 때 칠순의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다. “니가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한테 조 선생 된다고 했어.” 전혀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면 이 쑥스러운 이야기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이었을 것이라고 우겨본다. 조 선생님은 고향 마을에 살았던 실제 인물이었다. 보통 키의 동실동실한 몸집에 머리는 짧게 파마했었고 얼굴은 둥글넓적하였다. 중년을 훌쩍 넘긴 목소리는 걸걸하였다. 남편은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 보상으로 교육대학 출신도 아닌데 교사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합당한 자격을 거쳤을 것으로 유추된다. 가르칠 실력이 없다는 둥 수완이 좋아서 1학년 담임만 맡는다는 뒷말도 따라다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조 선생님이 나의 담임을 한 적은 없다. 그저 학년 초 애향단을 조직할 때나 마을 꽃길을 조성한다고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 심을 때 담당 교사로 한두 번 정도 만날 수 있었다. 자상하거나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 꿈에 강림했음은 어린애에게도 어필하는 매력이 있었지, 싶다. 우리 마을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원불교 교당이 있었다. 잘 가꿔진 아담한 정원과 본당 외에 두어 채의 부속 건물도 있었다. 조 선생님의 집은 원불교 마당을 거쳐서 들어가면 또 대문이 나타나는 별당 같았다. ‘교사가 되어도 좋겠다.’라고 얼핏 꿈꾼 적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탈무드’에서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를 만났을 때였다. 로마가 유대 민족을 말살시키고 최대의 정신적 위기로 몰아넣은 게 기원후 70년부터였다. 이때 가장 크게 활약했던 벤 자카이라는 랍비가 있었다. 그는 자기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골똘히 연구했다. 그리고 로마의 유력한 장군을 찾아갔다. 그 장군에게 “당신은 황제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장군은 “황제를 모독했다.”라며 표면상으로 버럭 화를 내다가 벤 자카이에게 자기를 찾아온 목적을 말하라고 했다. 벤 자카이는 “딱 한 가지 소원이 있다.”라며 그것은 “한 칸의 교실이라도 좋으니 조그만 학교 하나만 지어 주고. 그리고 그것만은 없애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예언대로 장군은 황제가 되었고 황제는 유대의 “작은 학교 하나만은 절대로 없애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명을 내렸다.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만 있으면 자기 민족의 전통은 이어져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가 바란 대로 그 학교에 있던 랍비들이 민족의 지식과 전통, 신앙은 물론 유대의 얼을 지켰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생활 규범까지도 앞장서서 선도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학교가 오늘날 유대 민족을 전 세계에 우뚝 서게 만든 중요한 근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랍비처럼 좋은 교사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수박껍질 맛으로나마 느꼈던 적이 있었다. 말이 씨가 되었던지, 무의식중의 자성예언이었던지 나는 정말 교사가 되었다. 동네 어른들의 말대로 조 선생이 아니고 김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날 불렀을까? 대답할 자신감이 없기도 했고 대답 대신 돌아보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라면 요즘 말로 ‘최애’의 존재였다. 나에게도 그런 은사님이 대부분이었고 높고 귀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여도 되나 스스로 반문하기도 했다. 1983년 봄, 나는 강진 J 중학교 1학년 1반 담임이었다. 첫 소풍을 하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학급의 맨 앞에서 걷는 인솔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군사정권 시대였던지라 소풍의 명칭도 행군으로 바꿔 부르던 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생들은 교실을 떠나는 홀가분함에 날아가고 있었다. 뒤에서는 학생부 선생님이 “오와 열을 맞추라.”라고 고함을 쳐댔다. 신출내기 교사는 땀을 삐질 거리며 앞뒤로 뛰어다녔다. 속된 말로 바짓가랑이가 찢어지고 운동화 한 짝이 벗겨진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걸음이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 놀랄 지경이었다. 덕분에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소풍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길을 잃었다. 3월 말이나 4월 초에는 가정방문을 하는 월중행사가 있었다. 사나흘 정도의 일정이었다. 집집이 방문하여 학생의 학교 밖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길라잡이 학생 한두 명과 마을별로 찾아갔다. 부모님과 상담하고 공부방 여부 정도를 살폈다. 부모님이 일터에 나가서 없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집에 남아 있던 조부모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아껴두었던 달걀 한두 개를 쪄서 인정으로 내놓기도 했고, 보리 잎을 넣은 백설기 한 조각을 챙겨주기도 하였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던 까치내 들판은 봄빛이 완연하였다. 봄빛 먹은 보리밭은 내륙 깊숙이 파고든 강진만과 잇대어 푸른 물결로 넘실거렸다. 그 위로 발그레한 석양빛이 무르익었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뜻 모를 헛헛함을 경계하려고 조선 시대에 이 고장으로 유배당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을 감히 떠올려 보았다. 18년 동안 딱한 현실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저 노을빛을 바라보았을까?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노래했던 시인 김영랑은 또 시대의 어떤 아픔을 아로새기며 저 광경을 맞이했을까? 객지 생활의 위안거리를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방천길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어깨에 걸쳤던 괭이를 황급히 내려놓고는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부여잡았다. 투박하고 거친 촉감이 뼛속까지 스몄다. “저 성인이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인이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깊숙이 굽혀 절하였다. 자식의 선생이 왔다는데 행여 못 만날까 봐 들판에서 황급히 달려왔던 아버지! 뉘라서 중년의 어른이 선뜻 손을 내밀고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한단 말인가. 뒷머리를 쿵 맞은 것 같았다. 성인이 아버지를 만난 후로 교사에 대한 환상이나 껍데기는 버렸다. 자신감이 있든 없든, 유능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조 선생이든 김 선생이든, 밥줄에 전전긍긍하든 존경의 대상이든 학생이 바라보는 선생, 학부모가 기대하는 교사는 어쩌면 또 하나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교직에 근무하던 동안 슬프거나 기쁘거나 잠들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나는 늘 성인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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