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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왜 전주에 도읍을 정했는가

송화섭(후백제학회장․중앙대 교수)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1월 26일

ⓒ e-전라매일
1. 신라하대 백성들은 삼중고(三重苦)에 농민봉기를 일으키다
신라하대 사회에서 신라의 국가적 기능은 마비돼 갔다. 그 요인을 크게 왕권쟁탈, 흉년기근, 조세부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진골귀족들의 왕권쟁탈이다. 신라는 골품제사회였기에 권력 계층의 주체는 진골귀족들이었고, 진골귀족들은 신분적 폐쇄성에 갇혀 있었다. 신분적 폐쇄성은 뼈대 있는 집안과 혈통(骨族)만이 권력층을 형성하고 왕권을 차지하고 혼인도 골족끼리 했던 관행에서 비롯됐다. 신라의 뼈대 있는 가부장적 혈통(聖骨)이 선덕여왕대에 깨지면서 진골(眞骨)들에 의해서 골품제도가 와해 되고 왕권다툼이 시작했다. 진골귀족의 왕권 찬탈이 제38대 원성왕(784)에서 45대 신무왕(839) 사이 56년 동안 자주 발생했다.
특히 신라 선덕여왕 이후 내물왕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왕권쟁탈에 대한 내분과 반란과 모반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정정이 매우 불안했다. 신라의 권력계층은 왕권쟁탈에 빠져 백성들의 돌봄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신라하대사회에서 자연재해의 발생이다. 신라하대 155년동안 자연재해의 발생은 44회에 이르렀고, 자연재해로 흉년, 기근(飢饉) 발생과 전염병 발발도 18회에 이르렀다. 자연재해는 먹고사는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상기후는 농작물의 생육에 영향을 끼쳐 흉년과 기근으로 이어졌고, 백성들을 굶주림에 시달렸고, 백성들은 신라정부에 원성과 불만을 갖게 됐다. 백성들은 봄 여름철에 가뭄과 홍수, 황충이 창궐해 농작물 수확이 어려우면서 흉년으로 기근에 전염병까지 발생하는 삶의 고통은 반복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753(경덕왕12)년부터 886년(정강왕1)년까지 흉년으로 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퍼지면서 자연재해는 재앙이 됐다. 어찌보면 오늘날 코로나19도 전염병으로 기후변화의 위기에서 찾아온 재앙일 수 있다.
셋째, 신라 백성들은 자연재해로 흉년 기근이 발생하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정부의 조세와 공부를 납부해야하는 게 더 큰 부담이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진골권력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식이었다. 자연재해로 생활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지방관리의 타락과 기강해이, 부정부패가 농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권력집단이 부패하면 하부조직도 부패하고 타락하는 게 원리이다. 특히 지방관리들의 중간 착취가 심했다.
진골귀족들의 녹읍민에 대한 과도한 수취가 토지 불균형을 가져왔고, 빈번한 자연재해와 흉년 기근으로 농민들은 생활고로 지쳐가는데, 농민들에게 조세 부담의 가중은 자포자기 상태로 만들었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신라 백성들은 조세 납부의 독촉과 흉년기근의 빈발, 정정불안 등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농민봉기에 나섰다.
‘삼국사기’기록에 815년(헌덕왕7)에는 흉년 기근으로 도적(盜賊)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819년(헌덕왕11)에는 초적(草賊)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도적떼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초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신라 농민들이 삶을 포기하고 총궐기에 나선 것이다. 농민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서 집과 토지를 버리고 유망민으로 길거리에 나섰다. 초적과 도적은 배고픔에 지쳐 최소한의 생계권을 외치면서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든 신라 백성들이었다.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발생하자 도적과 초적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각지의 권력 지향의 유력자들이 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유력자들은 초적들을 이끌고 반신라적인 성향의 민중봉기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궁예와 견훤이었다.
ⓒ e-전라매일

2. 견훤은 광주·전남에서 마한계 호족들에게 비토당하다
견훤은 신라 방수군의 비장으로서 충직한 장수였다. 신라 왕실이 타락하고 왕권 찬탈로 정정이 불안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흉년 기근으로 농민들이 초적떼로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 전개되자 견훤은 정치적 야망을 품는다. 견훤은 자신의 활동 근거지인 순천만 일대에서 무리 5천명을 규합해 892년에서 무진주(현 광주)를 습격했다. 무진고성을 점거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 못했다(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왜 그랬을까. 무진주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으나, 광주 전남지역의 정치적 여건과 환경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견훤이 스스로 왕(自王)이라고 칭했지만(稱王) 드러내놓고 왕으로 부르지 못했던 것일까. 광주 전남지역의 호족들이 견훤을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했다는 뜻이다.
그 배경은 광주 전남지역의 마한계 지방세력이 각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광, 함평, 나주, 영암, 강진, 해남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마한고분군들이 말해준다. 전남지역의 마한계 지방세력이 호족으로 성장해 백제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 광주 전남 일대를 분할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훤은 광주, 전남지역의 호족들을 포섭해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여수 순천의 대표적 호족인 박영규와 김총을 포섭해 자신감이 있었으나, 영암 나주 함평 지역의 호족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나주의 호족인 오다린을 포섭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나주, 영암 등지의 마한계 토착적 지방세력들은 해상호족으로 영산강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계 백제고분군들이 말해준다. 견훤은 광주 무진고성을 근거지로 호족들을 연합해 나라를 세워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8년 동안 공을 들였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나주의 오다린 세력들이 영산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광주를 장악해본 들 수로교통과 해상교통은 막힐 수밖에 없다. 결국 사면초가에 빠진 견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됐다.
새로운 돌파구는 전주입도 구상이다. 마침내 견훤은 광주를 떠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겠다는 구상을 마치고 전주선언을 준비한다. 광주에서 나라를 세우는데 실패한 견훤은 900년 광주를 떠나 전주에 입성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견훤이 서쪽을 순행해 완산주에 이르렀는데, 완산고을 사람들이 견훤을 맞이해 위로했다(萱西巡至完山州 住民迎勞)”는 내용이 있다. 완산고을 주민들은 견훤의 전주입성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광주 전남는 마한계 호족들을 규합하는데 많은 공력과 오랜 시간을 낭비했지만, 전주 입성는 백제계 백성들이 열렬하게 환호하면서 맞이해준 것이다. 견훤은 완산주 백성들이 환호하는 열렬하게 환영해 준 데에 고무된 나머지 ‘전주선언’을 한다.
ⓒ e-전라매일

3. 견훤은 전주에서 완산백제(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의 전주선언문에는 “내가 삼국의 시초에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났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따라 일어났다. 이 때에 백제는 나라를 金馬山에 창설해 그 역사가 600년이 됐는데,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이 수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오고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력해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내가 완산에 도읍을 정해 의자왕의 숙분을 풀어내겠다”고 선언하고 후백제 건국을 선언했다.
견훤의 전주선언에는 신라가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분개하면서 의자왕의 숙분을 씻어드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만약 전주에서 입도하지 못하고 광주에서 입도했다면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라의 명칭도 후마한이라 했을까?
견훤은 광주에서 마한계 호족들에게 의지해 나라를 세우는데 난망해지자 전주에서 백제계 백성들을 입도의 주도세력으로 선택한 것이다. 견훤의 전주선언은 백제인의 후예들에게 백제의 역사와 사상을 잇는 강력한 민주국가를 세우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드러낸 것이다. 견훤이 광주를 떠나 전주에서 백제의 국가적 정통성을 잇는 후백제를 정도(定都)하겠다는 왕도프로젝트 구상이다.
견훤은 정략적으로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됐다고 전주선언문에 담았다. 견훤이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의 역사를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익산백제의 부활을 선언한 것은 백제의 국가적 계승과 익산 미륵사의 미륵사상을 이념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견훤의 역사인식에서 마한정통론(馬韓正統論)을 읽어볼 수 있다.
견훤의 마한정통론은 견훤이 완산에 세운 후백제의 국가적인 정통성을 익산백제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후백제의 건국은 단순히 개인의 욕망이 아닌 민족정통성을 잇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포괄적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견훤의 마한정통론은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했다는 역사인식에서 읽어볼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조선의 준왕이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들어와 한지에 거주했다(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는 내용이 있다. 준왕이 한지(韓地)에 내려와 한왕이 됐다는 내용이다. 한지가 익산 금마라는 사실을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제왕운기’에 준왕이 금마군에 도읍하고 다시 임금이 됐다는 기록을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쓴 ‘동국지리지 ‘동사강목’, ‘아방강역고’, ‘해동역사’등에 한결같이 인용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익산 금마산에는 기준성(箕準城)이 축성돼 있다. 현재 미륵산성이 기준성이다. 기준성은 기자조선의 준왕이 익산 금마에 내려와 쌓았다고 알려졌다. 견훤은 고조선-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정통성을 강조하려고 익산백제 600년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견훤은 실제 백제와 후백제를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실제 금석문과 자료에는 백제, 백제성(百濟城)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말하자면 익산백제로 축약되는 전백제가 있었고, 견훤 자신의 백제는 후백제라는 역사인식이다. 견훤의 전주선언은 자신이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요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의자왕의 치욕을 씻어주겠다는 천명이 핵심이었다. 이 발언은 견훤 스스로가 익산백제의 계승자임을 밝히고 백제의 역사와 사상을 잇겠다는 의지와 신념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견훤은 전주에서 완산백제(후백제)의 꿈을 실현했다.
아직도 견훤이 광주에서 세운 후백제가 전주로 천도(遷都)됐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서 말했지만 견훤이 광주에서 세웠다는 국가 명칭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광주에서 입도했다면 후마한이었지 후백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신라 말기 광주․전남은 마한의 기운이 살아있었던 지역이며, 지금도 마한의 전통과 역사를 자임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견훤이 광주에서 후백제를 도읍했다는 사료와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다. 견훤이 광주에서 8년동안 자왕․칭왕 행세를 할 때에 치소성으로 활용한 곳은 무진고성으로 알려졌는데, 무진고성은 통일신라시대 무진주의 치소성이었지 왕성과 도성은 아니었다.
따라서 견훤은 처음으로 전주에서 후백제의 국호를 내세워 정도(定都)를 했고 후백제왕이라 호칭했던 것이다. 견훤은 광주․전남(마한권)에서 호족 연합에 실패하고, 백제의 땅 전주에서 민족 정통의 민주국가 후백제를 건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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