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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과 미륵정토사상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4월 06일
ⓒ e-전라매일
호남평야는 미륵신앙의 원천이었다

892년 광주를 습격하여 자칭 왕이라고 불렀던 견훤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광주를 떠아야 했다. 견훤은 광주에서 정권 수립에 실패한 셈이다. 견훤은 광주 전남 지역의 마한 전통 지방세력의 텃세를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오히려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고 칭하지 못하였다(猶不敢公然稱王)는 내용이 말해준다. 견훤은 광주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자신 스스로 입지와 포부를 밝히는 선언을 하는데, 그 선언문에 백제의 땅으로 진출하여 무진주, 전주, 공주의 주군사를 맡고 전주자사로 나아가겠다고 밝히고 서명을 하였다.
견훤은 왜 그토록 넓고 넓은 백제 땅에서 전주에 들어와 전주자사를 맡겠다고 하였을까. 현재 충남 계룡 행정도시같은 곳도 있는데, 굳이 전주를 택한 것을 무엇때문이었을까.
전주구상은 견훤의 광주선언에서 한층 더 뚜렷해진다. “이제 내가 어찌 완산에 도읍을 세우지 않고 의자왕의 치욕스러운 분노를 갚는다 하겠는가(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또 하나, “이때 백제가 나라를 금마산에 창설하여 그 역사가 600년이 되었다고 하였다(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는 내용이다. 이때가 신라 진성여왕 재위 6년 892년이다. 왕권의 아첨꾼들이 임금곁에서 정권을 농락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국가기강이 문란해지고 해이해져 국정불안은 극에 달하던 때였다. 때마침 신라하대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던 흉년기근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군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던(百姓流移 群盜蜂起) 때였다. 군도(群盜)는 떼도둑이었다. 떼도둑은 굶주림에 지친 유이민들일뿐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흉년은 이상기온에 따른 자연재해이기 때문에 전라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견훤은 젊은 25세 나이에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용감한 기풍을 가졌기에, 굶주림에 지쳐서 흩어지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었다. 백성들은 모여서 봉기하면서도 먹을 것을 찾아서 이지저리 흩어지는 심각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견훤은 생활도탄에 빠져 울부짖는 무리들을 모아서(嘯聚徒侶) 나라를 일으키려는 야심을 품는다. 부정부패하고 타락한 국정농단세력을 배격하고 오로지 배고픔에 지쳐 아우성대는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에서 광주를 습격하였으나, 광주에서 백성을 구제할 희망의 빛을 찾지 못하였다. 견훤은 백성을 위한 희망의 나라를 건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차선으로 전주를 선택하게 된다. 희망의 나라는 오로지 백성들이 잘먹고 잘 사는 세상이다.
ⓒ e-전라매일
견훤이 광주선언에 앞서서 선택지로서 전주구상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가경쟁력은 오로지 농업경제력이었다. 농업경제력 기반은 광주보다 전주가 훨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견훤의 눈에 김제 벽골제가 들어왔다. 벽골제는 호남의 중심이었다. 호남은 벽골제, 황등제, 눌제의 호수 남쪽을 가리키는데, 삼호(三湖)가 모두 전라북도 평야지대에 위치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다. 견훤에게 벽골제는 황금의 제방(金堤)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제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실제 견훤은 고부 눌제(訥堤)를 개축한 바 있다. 전주는 삼호를 품고 있는 배산임수의 길지였다. 배산은 성황산이요, 임수는 삼호였다. 삼호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위로할 수 있는 농업경제력의 원천이었다. 330년에 초축된 벽골제가 황금의 제방이라면, 호남평야는 황금의 땅이었다.

ⓒ e-전라매일
후백제 도읍지, 전주는 도솔천내원궁이었다

견훤은 물질적 토대를 찾았으니 다음에는 정신적 토대를 찾는 구상을 하였다. 국가통치의 이념이 필요하였다. 그 정신적 이념이 미륵신앙이었다. 견훤이 백제가 익산 금마산에서 개국하였다는 익산백제를 신봉하였던 것은 무왕이 창건한 익산 미륵신앙을 선호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주의 이웃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금산사도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중생구제도량이었다. 전주는 우측에 익산 미륵사를 끼고 좌측에 김제 금산사를 끼고 지리산의 지맥이 내려온 전주 성황산을 등지고 만경강 유역의 익산, 옥구 평야를 품고, 동진강 유역의 김제, 만경 평야를 품고, 눌제천 주변의 정읍,고부 평야를 품고 있는 국가왕도로서 이상향의 길지(吉地)가 되었다. 견훤은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견훤이 꿈꾸는 희망의 나라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견훤은 전주를 현실 속의 도솔천내원궁이라 판단하고 전주 입경(入京)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견훤이 전주로 들어온다. 『삼국사기』견훤전에 “견훤이 서쪽 지방을 순회하면서 완산주에 이르렀다. 완산주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니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이라 하여 기뻐하였다(萱西巡至完山州 住民迎勞 萱喜得人心)”는 내용이 있다. 견훤의 입경로는 광주에서 구례, 남원, 오수, 임실을 경유하는 산간길을 선택하지 않고, 함평, 고부, 정읍, 김제, 금구를 경유하는 평야지대를 둘러보고 입경하는 들판길을 선택하였다. 평야지대에서 생활하는 농민들의 실상을 살펴보고자 함이었다. 견훤의 들판길 입성은 농민들의 고통과 생활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주민들이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그만큼 평야지대 농민들은 수준높은 민주의식이 체질화되어 있다. 잠깐 외도한다. 3월 대선에서 전라북도민들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율 82.98%였다는 사실은 민주의식이 그만큼 높고 미래지향적인 정서를 보여준 것이다. 공산당대회에서 볼 법한 묻지마 투표율을 보여준 강삼구 투표율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강삼구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논하지 마라.
다시 돌아간다. 호남평야 사람들은 견훤의 백제의 땅 출현을 미륵 출현이라고 반겼을 것이며, 견훤도 전륜성왕이 아닌 미륵으로 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륵불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게 아니라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두려워마라 소원을 품겠다)의 손짓으로 재난구제에 앞장서는 부처다. 견훤은 오탁악세(五濁惡世:末世)에 빠진 백성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했고,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나선 미륵신앙의 신봉주의자요, 민주주의의 실천자였다. 농민들의 소원은 농사풍년 그 이상은 없다. 익산 미륵사와 김제 금산사의 미륵도량에는 농민들을 위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 e-전라매일
전라북도는 백제 미륵신앙의 발상지이다

익산 미륵사는 용화산 골짜기 연못(蓮池)을 메꾸고 미륵도량을 조성하였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에 오를 때 미륵삼존물이 연못에서 솟아나 선화공주의 소원에 따라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무왕은 지룡(池龍)의 아들이다. 금산사도 무악산 기슭의 연못을 숯으로 메꾸고 미륵전을 창건하였다. 금산사 연못에서 쫓겨난 용은 김제 벽골제로 내려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실제 벽골제에는 용추(龍湫)와 용연(龍淵)이 있었다. 두 미륵도량은 연못에 세워진 가람이다. 연못은 용(龍)의 처소이다.
익산 미륵사와 김제 금산사에서는 용이 미륵으로 화현(龍卽彌勒)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 금당 구조에는 암실이 조성되어 있다. 암실(暗室)은 용의 처소다. 암실 위에 금당이 세워진 것이다. 금산사도 연못지에 거대한 쇠솥을 얹혔고, 그 위에 미륵삼존불을 조성하였다. 미륵 사와 금산사 둘다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지중(池中)출현 방식이다. 도솔천내원궁 연못에 상주하는 용왕은 미륵출현을 앞두고 대지에 화향(花香)의 비를 내려준다. 천수답으로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용의 출현은 미륵 출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와같이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은 익산 미륵사에서 김제 금산사까지 이어졌다. 백제의 정신과 사상을 잇겠다고 선언한 견훤에게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을 잇는 것은 후백제의 정통성이나 다름없었다. 견훤은 왕도를 조성하는 방식부터 서방정토형 계획도시를 건설하였다. 전주 성황산-기린봉을 배산으로 동좌서향(東坐西向)의 왕도를 조성하였다. 서향은 서쪽 평야지대 농민들의 마음을 품는 의미도 있지만, 서방정토세계의 실현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였다. 서방정토는 아미타불이 주도하는 정토세계를 말하지만, 미륵불이 주도하면 미륵정토세계가 된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익산 미륵사는 한국 미륵신앙의 발상지이다. 백제 미륵신앙의 원형질은 가람의 구도와 배치에서 살펴보자.
가람의 구도는 미륵상생처와 미륵하생처가 있다. 상생처는 미륵보살이 좌정하고 있는 도솔천 세계를 말하고, 하생처는 미륵불이 출현해야 할 염부제 세계를 말한다. 익산 미륵사는 상생처는 사자사(師子寺)이며, 하생처는 미륵사이다. 김제 금산사는 상생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요, 하생처는 미륵전이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중생구제를 위하여 염부제 세계로 내려온다고 하였다. 미륵보살이 이 땅에 출현하여 설법할 용화삼회의 설법장은 어떠한 모습일까.
미륵사는 용화산 아래에 3탑 3금당의 3원식 가람으로 조성된 용화삼회의 설법장이라면, 금산사는 미륵전을 용화삼회의 설법장으로 조성하였다. 미륵전에는 1층에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한마디로 미륵전은 위대하신 미륵보살이 출현하여 용화삼회의 설법장이라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의 3원식 평면 가람배치를 보여준다면, 김제 금산사는 3층 입체의 미륵전을 가람으로 조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평면이냐 입체냐 하는 차이일뿐이다.

ⓒ e-전라매일
후백제 견훤은 미륵정토세계의 설계자였다

이러한 백제 미륵신앙의 정통성을 견훤은 어떻게 수용, 계승하였을까. 견훤 정권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살펴 본다면, 전반기는 궁예정권과 신라정부와 싸우는데 몰두한 나머지 국가이념을 설정할 겨를이 없었다. 궁예정권이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견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나라다운 나라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견훤은 건국이념을 익산 미륵사에서 찾았다면, 심신의 안식처를 김제 금산사에 둔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922년 미륵사개탑을 주도한다. 미륵사개탑은 미륵사에서 새로운 탑을 연다는 것인데, 기존 미륵사에서 견훤이 석탑, 목탑을 열었다는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익산 미륵신앙권역에서 미륵사개탑의 대상은 왕궁리5층 석탑이다.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신라계 5층석탑 기단부를 갖춘 후백제 시기의 백제계 석탑이다. 견훤정권의 미륵사개탑은 백제의 정신과 사상을 승계하여 백성들을 위한 미륵정토세계를 실현하겠다는 호국불교적 선언의 의미가 있다. 왕궁리 5층석탑 개탑은 견훤이 후백제 백성들에 대한 약속의 징표였다.
신라말 고려초에는 왕실의 원찰(願刹)이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 왕실의 원찰을 김제 금산사에 조성하였다. 기록은 없지만, 금산사에는 견훤이 쌓았다는 석성이 있고, 견훤이 왕위에서 물러나 금산사에서 안식처로 거주하였다. 금산사의방등계단에는 부조화의 석탑, 5층석탑이 조성되어 있다. 가람 구도상 방등계단의 5층석탑은 생뚱맞다. 앞에서 방등계단은 미륵상생처라고 했다. 방등계단에는 석종형부도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후백제 시기의 5층석탑을 앉혔다. 석종형부도는 금산사가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이 결합한 기복도량의 상징성을 갖는다. 추정컨대 견훤은 노후에 금산사에서 극락왕생을 서원하면서 5층석탑을 방등계단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평생의 역점사업으로 추진해온 백제 미륵정토세계의 구현은 조선후기 1892년 동학농민혁명으로 꽃이 핀다. 동학농민혁명은 용신앙, 미륵신앙, 동학사상의 3단 구조에서 꽃이 피었다. 고려중기 후백제유민들은 선운산 도솔암에 금산사 법상종 계통의 미륵도량을 조성한다. 그 도량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과 도솔천 내원궁(지장전)이다.
익산 미륵사, 김제 금산사, 고창 도솔암에는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이 관통하고 있다. 이 세 미륵도량은 호남평야를 품고 있으며, 그 정점에 김제 벽골제가 있다.
완산백제 전주가 호남평야를 품고 있다. 벽골제에는 농민들의 서원이 깃들어 있다. 풍요로운 농촌의 실현은 오풍십우(五風十雨)에 달렸다. 고조선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렸듯이, 용(龍)을 부릴수 있는 자는 도솔천내원궁의 미륵보살 밖에 없다. 그래서 견훤은 미륵보살의 아바타(Avatar)가 되고자 하였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4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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