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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는 한 나라를 통치할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곳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5월 25일
ⓒ e-전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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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는 왕도이면서 왕조의 뿌리였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王都)이고 조선왕조의 관향(貫鄕)이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이면서 왕조의 탯줄인 곳은 전주가 유일하다. 여기서 왕도는 견훤왕이 900∼936년, 36년간 전주에 도읍을 정해 후백제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또 왕조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해 1910년까지 518년간 유지해 온 조선왕조를 가리킨다. 그만큼 전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천년고도다. 왕대밭에서 왕대난다는 말이 있듯 전주는 일찍부터 한 나라를 통치할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곳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 전북지역은 전주보다 익산 금마와 정읍 고부가 중심이었다. 고부는 백제의 5방(方) 중 중방성(고사부리성)이 자리하고 있었고 금마는 백제 말기 왕도였다. 익산 금마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망명한 곳이요, 이후 마한의 거점이자 백제 무왕이 마지막으로 천도(別都地)한 곳이다.
당시 전주는 백제의 지방 군현(郡縣) 중 하나로 완산(完山)이라 불렸다. 완산은 인근 몇 개의 현을 관할하는 군에 해당하고, 통일신라 때인 685년(신문왕 5년) 완산주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 통치조직을 개편했는데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총관(摠管)을 보내어 통치했다. 9주 중 오늘날의 전라도에는 완산주(전주)와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를 두었다. 완산주에는 남원소경(南原小京)과 10개 군, 31개 현을 속하게 했다. 완산에서 시작한 고을이 현재의 전주 도심부로 중심이 바뀌게 된 것은 757년(경덕왕 16년) 완산주의 명칭을 전주로 변경하면서 부터다(전북대 하태규 교수). 전주라는 명칭은 원래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한다. ‘원’은 ‘온’의 차음(借音)으로 ‘온전하다’는 의미다. 통일신라가 지방조직을 9주로 개편할 때 주현의 명칭을 중국식 명칭으로 바꾸었는데 완산의 한자식 표현인 전주로 개칭한 것이다. 이후 전주는 전북지역 치소로서 도독이 주재하는 지방통치의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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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때 전주서고가 모두 불탔다

통일신라 말에는 견훤왕이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왕도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견훤왕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안을 지키는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진성여왕 때로, 실정(失政)과 흉년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견훤왕은 889년 순천만에서 거병한 후 군사 5000명을 이끌고 892년 무진주를 점령, 자왕(自王)이라 칭했다.
그러나 나주와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들을 포섭하지 못해 해상교통로 장악에 실패했다. 그래서 부득이 전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900년에 백제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풀겠다며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공식 국호는 백제이나 종전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라 부름)를 건국했다.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국가 수립을 대외에 선포했다. 견훤왕은 전주 인봉리(군산대 곽장근 교수) 또는 물왕멀 일대에 왕궁을 짓고 동고산성, 남고산성 등 성곽 설비를 하는 한편 관부(官府)를 정비했다. 후백제의 영역은 전주를 중심으로 북으로 금강 이남, 남으로 영산강 상류 이북, 동으로 낙동강 이서지역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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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은 건국과 함께 중국의 오월(吳越), 후당(後唐) 등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일본, 거란 등에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때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했다. 본격적인 후삼국 패권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견훤왕은 먼저 신라를 징벌하기 위해 927년 경주를 공격해 고려와 가까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이러한 공격에 왕건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고려군을 이끌고 왔으나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에 대패했다. 견훤왕은 공산 전투 직후에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浿江·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
이는 견훤왕이 대동강 이남의 삼한을 재통일하겠다는 포부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보면 가슴을 뛰게 하는 대장부의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견훤왕은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 크게 패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아들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몰락을 재촉했다. 견훤왕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이 동생들과 모의하여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킨 것이다. 견훤왕은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귀순했고 결국 936년, 건국 45년만에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했다.
이때 안타까운 것은 전주서고가 모두 불탔다는 점이다. 견훤왕은 경주 침공 시에 모든 서적을 전주로 옮겨왔는데 고려는 전주성과 함께 전주서고에도 불을 질렀다. 실학자 이덕무는 아정유고(雅亭遺稿)에서 이를 ‘3000년 이래 두 번의 큰 재앙(厄)’이라 애석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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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는 1000년을 이어온 전라도의 중심이다

후백제가 망하자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주는 고려의 지방 군현 중 하나로 위상이 낮아졌다. 고려는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해 군사적 거점으로 삼고 전주성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940년 군현 개편 때 다시 전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유감인 것은 태조 왕건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훈요십조(訓要十條)다. 위작 시비가 없지 않으나 제8조에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이후 호남 차별의 근거 중 하나로 악용되었다.
고려 때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는 1018년(현종 9년)에 행해진 행정구역 개편이다. 이때 지방행정구역을 5도 양계로 개편했는데 전북에 해당하는 강남도와 광주·전남에 해당하는 해양도를 합쳐 지금의 전라도가 탄생한 것이다. 1000년 넘게 이 명칭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주목(全州牧)과 나주목(羅州牧)이 행정의 중심이었다.
한편 고려는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입에다 말기에 들어 왜구의 약탈까지 겹쳐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1380년 왜구는 전함 500척을 앞세워 진포(군산) 앞바에 침입했으나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이들을 격멸했다. 이어 이성계는 이들 잔당과 이미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 들어와 있던 왜구를 남원 황산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때 왜구 토벌에 앞장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는 개성으로 개선하다 자신의 본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일가친척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기분이 좋아 춤을 추며 한(漢)고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역성혁명을 암시했다. 함께 자리에 있던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스러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시(登萬景臺詩)로 읊었다. 곧 이어 위화도 회군을 거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고, 전주는 풍패지향(豐沛之鄕·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서 유래)으로 조선의 뿌리가 되었다.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발산(鉢山 또는 發李山) 아래 자만동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영흥에 정착하기 전 까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안사가 어린 시절 놀았던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 등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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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이성계는 건국 후 자신의 탯자리인 전주를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켜 전주의 위상을 높였다. 또 성종 대에는 양성지(梁誠之)가 전국에 5경(京)을 세워 통치하는데 그 중 전주를 남경(南京)으로 삼도록 건의했다. 그러다 1589년 전주 출신 혁명가 정여립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면서 호남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만민의 신분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등 대동(大同)사상을 주장했던 정여립은 당쟁의 희생양이었으나,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몰렸으나 이순신 장군과 의병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당시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을 남겨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은 4대 사고 중 전주사고 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황혼을 예고했다. 처음에 고부에서 일어난 혁명은 부패한 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나아가 반봉건 반외세 투쟁 성격을 띠었다. 이 혁명은 크게 1894년 2월의 고부봉기(1차)와 5월의 전주성 봉기(2차), 10월의 삼례봉기(3차)로 나눌 수 있다. 1차 봉기는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새벽 전봉준을 비롯한 1000여 명의 농민군이 말목장터에 모여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1차 봉기에서 농민군은 자진해산했으나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按覈使)가 농민들을 역적으로 몰자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백산에 모여 궐기한 후 5월 11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퇴하고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하지만 농민군은 청과 일본에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었으며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비단 일시적인데 그쳤으나 농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치행정을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선왕조가 기울어가자 1899년 고종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시 왕실의 뿌리인 전주에 주목한다. 오목대와 이목대에 각각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친필을 내려 비(碑)와 비각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영조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데 착안해 1771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 경내에 조경묘를 세우고 시조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1899년 다시 고종은 건지산에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하였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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