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굴암 가는 길, 五體投地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었지만, 못난 선비는 충정심 갖고 아침저녁으로 수직했네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2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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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556책 15궤 그리고 태조 어진 등” 임진전쟁이 발발 당시(1592. 4. 13.)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 등의 내용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며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이 와중에 조선왕조실록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그간 한양의 춘추관과 경상도 상주 그리고 충청도 충주에 보관되어 있던 사고 역시 모두 잔악한 왜군에 의해 불타고 말았다. 전주사고까지 소실된다면 조선 건국 태조부터 13대 명종 때까지 약 180여 년의 기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처지였다.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및 ‘태조어진’ 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보물들이었다. 게다가 금산에 진을 치고 있던 2만여 일본군이 웅치를 넘어 전주성 밖까지 다가와 있던 상황으로,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관찰사와 논의했지만, 인근의 땅에 묻는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처지였다. 포로로 잡은 왜군에게서 성주사고본의 실록이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변산반도도 안심할 곳은 못 되었다. 그때 전주사고 관리 담당 책임자인 참봉 오희길(1556~1625)은 평소 친분이 있고 주위에 신망 있는 태인의 유생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祿, 1537~1610)에게 상의하고 또 그들은 내장산 영은사(靈隱寺, 현 내장사의 옛 이름) 주지 희묵(希黙)을 소개하여 그 산의 깊숙한 골짜기에 있는 은봉암에 이안(移安:안전하게 모심)할 것을 약속받는다. 이렇게 하여 틀은 잡혔지만 이를 운반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침략군과 싸울 말과 병력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절의 스님들, 손홍록의 노비 등 가솔 30여 명, 산골의 약초 캐는 사람과 심마니, 사당패 등 100여 명이 수십 마리의 우마와 함께 참여했다. 6월 15일 전주사고를 떠나 22일에 내장산 은봉암에 도착한다. 메고 지고 태운 사고는 더운 여름 날씨로 주로 야간을 틈타서 밤새도록 이동했다. 하루에 한 고을 단위로 움직여 1주일 만에 도착은 했지만, 그곳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또다시 더 험하고 깊숙한 곳의 비래암(飛來庵, 은적암이나 용굴암 부근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음)으로 옮기기로 했다. 산세의 험함과 경사 때문에 궤짝 대신 지게에 책을 몇 권씩 담아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옮겨야 했다. 7월 1일에야 겨우 도착한 까치봉 중턱 용굴암(龍窟庵)은 오직 하늘만 보일 뿐 숲이 빽빽이 우거져 은신처로는 적격이었다. 또 200여 m를 오르락내리락한 끝에 다다른 인근의 은적암(隱寂庵) 또한 사다리로만 길을 잇고 끊을 수 있어서 어진과 실록을 보관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깎아지른 수직 절벽에 길도 없고, 발을 잘못 내딛는 경우에는 100여 m 아래로 추락하고 말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산짐승들마저도 다니기 힘든 비탈이다. 길도 없고, 급경사면의 바위뿐 붙잡을 것도 마땅찮은 그야말로 “위는 바로 볼 수 없고 오직 높고 높은 하늘만 보일 뿐이다.”는 얘기가 이에 어울리는 형세였다. 지금은 모두 폐찰이 되어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아무튼 손홍록과 안의는 그곳에서 수시로 자리를 옮겨가며 실록지킴이(守職)를 해야 했다. 다음 해 7월 9일까지 무려 1년 18일(383일)간을 교대로 수직하거나 함께 근무하는 등으로 올인 했다.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었지만, 못난 선비는 충정심 갖고 아침저녁으로 수직했네.” 손홍록의 글이다. 이처럼 가족이나 친척의 안위보다도 실록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그 후 실록은 관의 주도 아래 충청도 아산 - 해주 – 강화도로 약 2,000여 리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또다시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양 태 규 옛글 21 대표 |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2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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