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디자인하다(1-5)]때때 언니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3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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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노을이 샐비어꽃처럼 붉은 가을날, 오래간만에 「아이보개」 모음곡을 들었다. ‘아이보개’는 아기를 돌보는 아이라는 말로 1960, 70년대까지 주로 10대 여자아이가 그 역할을 맡았다. 가야금 연주가 황병기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그 곡을 듣노라면 내 예닐곱 살 무렵 추억 한 꼭지와 스쳐 지나간 인연의 소녀가 떠오른다. 그의 이름은 ‘때때’였다. 때때는 마을의 어떤 부잣집에서 아기를 돌보아주며 더부살이를 했다. 청각과 언어 장애가 있었다. 정도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고 말 대신 “어버버버” 하거나 “때, 때” 하면서 손짓과 발동작으로 의사를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보개」는 가야금과 대금, 장구로 편성된 무용 모음곡이다. 10대 또래의 놀이와 생활을 주제로 했다. 악기 편성이 단조롭지만 듣고 있으면 천진했던 동심을 돌아보게 한다. 어린 시절을 테마로 삼았다는 점에서 얼핏 슈만의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정경」이 연상되기도 한다. 황병기의 이 모음곡은 4개의 장으로 작곡되었고 각각의 장에 「연날리기」 「행진」 「제기차기」 「귀가」라는 표제가 붙여졌다. 특히 곡의 후반부 「귀가」를 듣노라면 밖에서 놀다가 해 질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얼비친다. 가야금 연주의 빠르기는 느슨하고 대금의 선율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고졸하다. 아기를 업고 귀가하는 아이보개 모습이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 속에 내가 만났던 때때도 아기를 업고 서성인다. 때때라고 불렸던 데는 두어 가지 집히는 대목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발화하지 못하고 “때, 때” 하는 소리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그 시절에 때가 끼어 꼬질꼬질한 게 그녀뿐만은 아니었음에도 몸에 때가 많다고 그렇게 빗댔을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우리 마을에 살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이는 나보다 배 이상 차이가 났고 단발머리의 숱은 덥수룩했다. 이목구비는 약간 일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뼈대가 굵고 키가 컸으며 힘도 셌다.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다. 밥벌이로 늘 아기를 돌보아야 해서였다. 또래 아이들과 마음놓고 놀수도 없었다. 물론 영악한 친구들이 놀이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그래서였던지 그는 아기를 업은 채 예닐곱 살에서 아홉 살 정도 내 또래 주변을 배회하였다. 우리가 웃으면 표정으로 같이 웃고 놀이 장소를 옮기면 따라왔다. 위 또래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가끔 편이 짜지지 않거나 짝이 맞지 않으면 선심 쓰듯 한 번씩 때때를 끼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기를 업은 채로 놀이에 참여했어도 동생뻘인 아이들보다 탁월하였다. 추석 이튿날이었다. 온 마을 아이들이 동네 어귀 숲거리에서 놀이판을 벌였다. 그곳은 읍내로 통하는 길목이면서 서너 군데 둥그렇게 쌓아 올린 돌무지가 있었다. 늦은 하굣길에는 어둠 속에 잠긴 물체로 보여 등에 땀이 나는 곳이기도 했다. 달걀귀신과 도깨비불이 나타났다든가 밤이면 마주 보이는 산등성이를 타고 호랑이가 내려온다는 말이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전해지던 곳이었다. 더구나 멀지 않은 논 가운데 상엿집까지 있어서 으스스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우거진 숲이 시원했고 가는모래로 덮여 있어 어린애들이 놀기에 맞춤한 운동장이었다. 숲거리의 놀이 기구는 청년들이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 한 개가 다였다. 그랬는데도 아동들은 한가위 명절 기분 그대로 즐거웠다. 「아이보개」 모음곡 제2장 「행진」과 제3장 「제기차기」의 분위기가 이때 놀이 정황과 겹친다. 모둠, 모둠 나뉘어 숨바꼭질, 줄넘기,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등으로 시끌벅적 절정을 이뤘던 광경이 음악과 섞인다. 그때 때때도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보통 머슴을 살거나 남의 집에 얹혀살던 이들은 고향으로 명절을 쇠러 갔는데 그는 딱히 갈 데도 없었던 것 같다. 모처럼 명절 휴가이어서인지 그날은 아기를 업고 있지는 않았다. 오후 두세 시 무렵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놀이에 전념했다. 지나가는 비이길 바랐고 한여름이 지난 때라 그리 드센 비가 내리지는 않을 거라고 어린 마음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작달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빗소리가 숲을 집어삼켰고 번개는 번쩍번쩍하였다.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천둥소리가 멀리서 또 가까이서 우르릉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깐 눈이 멀 정도로 섬광이 비쳤는가 했는데 “따 다다닥! 우지끈” 하는 소리가 동시다발로 들렸다. 굵은 나무줄기가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으로 보아 어떤 고목이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천벌을 받은 사람이 벼락을 맞는댔는데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천벌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때였음에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먹구름 떼로 몰려왔다. 조무래기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여기를 빨리 떠야 한다는 절박감에 울며불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제자리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마을로 가야 했는데 숲과 마을 사이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큰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새 물이 불어 돌다리 위로 넘실댔다. 물살에 휩쓸리면 마른 가랑잎처럼 떠내려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냇물을 통과하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안전한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물가로 다가갔다. 신발이 벗겨지거나 엎어지기도 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물살이 가장 센 부분에 때때가 서 있었다. 아심찮게도 그가 큰 나무처럼 버티고 서서 숲 쪽에서 마을 방향으로 아이를 한 명씩 건너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개울을 건넌 우리는 이제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는데 이미 벼락 치는 소리에 겁먹고 세찬 빗줄기를 뚫고 번개와 천둥이 발끝에 계속 내리꽂히는 것 같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각자의 집으로 가는 걸 포기했다. 누가 먼저였을지 동네 첫 번째 집을 지나 두 번째 집으로 뛰어들었다. 마당을 지나 댓돌과 마루를 거쳐 안방으로 스며들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일을 하러 갔다가 우리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터였다. 남의 집 안방으로 긴급 대피한 크고 작은 아동이 스무 명은 좋이 되었던 성싶다. 와중에 누군가 벽에 붙어 앉으면 벼락을 맞을 수 있다고 해 벽과 거리를 두고 둥그렇게 둘러앉고 보니 순식간에 수건돌리기 놀이 대형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눈을 감고 양손으로 귀를 감싸 쥐며 머리를 숙였다.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불어닥쳤다. 방문 두 개 중 하나가 휙 열렸다. 애들이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질렀다. 문을 닫지 않으면 그곳을 통해 벼락이 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방문을 닫으라고 암암리에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아무도 닫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였다. 때때가 일어나서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활짝 열린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을 보니 창호지가 건성으로 붙어 있거나 숭숭 뚫려있었다. 여름을 나기 위해 만든 창호여서 열렸을 때나 별반 다르지 않게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러나 닫혔다는 안심의 정도가 달랐다. 문을 닫은 후 때때는 무섬증으로 떨고 있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기도 하고 등을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의 그런 행동들이 천둥소리까지 막아낸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무서움이 덜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내면의 따뜻한 심성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그리 되지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 아이들이 집 밖에서 놀이에 과몰입했던 건 허전해서였을 수 있다. 가족이 모두 논밭에 나가서 집안은 텅 비었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가 필요했을 시기에 아이들은 얼마간 방치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틈새를 때때가 함께해 주었다. 고허함을 채우려 어린이들이 바깥에서나마 또래, 또래 모여 졸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때때는 진정으로 온 동네 아이보개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장애가 있고 부족해 보여 누구도 관심있게 지켜주지 않았지만, 때때는 너무도 의젓하게 우리를 감싸준 속 깊은 언니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가끔 그 추석 이튿날의 현장이 수면 위에 떠 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 모음곡 「아이보개」를 들으며 고마웠던 때때 언니를 뇌어본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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