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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칼럼

그리움의 시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3년 11월 13일
ⓒ e-전라매일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 시절의 ‘나’를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린 내가 보지 못하는 그때의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움이란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안타 까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흘려보낸 것을 붙들 수는 없지만 그 리움을 마음속에서 끄집어내어 찬찬히 음미해볼 수는 있다. 지나간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놓친 고기가 크다는 말이 있다. 아름답 고 컸던 추억들의 이야기들을 추체험을 통하여 따라 읽어간다면 그 리움의 허상이 실체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 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 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 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 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자네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이 시는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 다. 눈을 감으면 시골 마을에 살던 우리에게 이웃 마을은 가슴 설레 는 연애의 고향이었다. 이웃 마을 총각에게 마음을 줘 보지 않은 처녀들이 없었을 것이고 이웃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한 총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그 그리운 시절, 누구나 다 그렇 게 가슴 설레는 연애 감정 없이 지낸 사람은 없다. 개방의 물결은 그 렇게 마을의 경계를 허무는 연애 감정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마을에는 이웃 마을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모든 집에는 그 여자가 산다. 혼자 보기 애틋한 이 시를 보고 박 완서 선생께서 이 시의 제목과 같이 <그 여자네 집>이라는 단편 소 설을 쓰셨다, 그 단편 소설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많은 학생 들이 이 시를 읽게 되었다. 차가 없고 걸어서 다니던 시절, 이웃 마을 을 지날 때 이웃 마을 처녀들이 물동이에 물 길어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비죽이 열린 사립문 안으로 그녀가 사는 마당을 슬쩍 슬쩍 엿볼 수 있었다. 연애질 하면 다리몽댕이를 부숴버린다고 엄포 를 놓아도 몰래 마을 뒷동산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 이 낳고들 살았다. 사랑은 국경선이 없고 하늘도 말리지 못한다고 하 였지 않았던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그 여자 그리고 그 여 자네 집,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때가 그립다.

/김영진
시인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3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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