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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을 디자인하다(1-8)] 명품 길 유감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3년 12월 13일
ⓒ e-전라매일
전주에서 정읍으로 출퇴근하던 무렵, 어느 날 출근길에서였다. 금구 초입에 있는 금천저수지 부근을 지날 때였다. 우측 도로변을 무심하게 바라보는데 ‘◦◦명품 길’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목재로 만든 조그만 직사각형 표지판이었다. 어림잡아 어른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쯤 되었다. 전문 광고사에서 제작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뜻있는 누군가가 소박하게 만들어서 걸었을 이미지였다. 자동차로 빠르게 스치면 못 볼 법도 한데 어쩌다 내 눈에 띄어 출근하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명품이라면 국보 ◦◦번 백자달항아리라든가, 김소운의 수필 「특급품」에 나오는 비자 목 바둑판 같으면 얼른 이해되었을 텐데. 하다못해 ‘루이◦◦핸드백’이라고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길 이름에 이런 단어를 붙이다니. “인간의 혼과 창의력을 가하여 빚거나 만들어 낸 가치 있고 아름다운 물건”이 명품이라는 원론적인 뜻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팽배했기로 길에 붙이는 명칭까지 상품화해서 이목을 끌어야 했을까. 물론 이렇게 만든 이는 좋은 뜻으로 그리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본 명품 길은 또 하나 있었다. 중인동 근처에서 근무하던 때였는데 길 이름이 조팝나무 명품 길이었다. 천변을 따라 만든 방천길로 계곡 위쪽을 바라보면 모악산 정상이 올려다보이고, 시내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삼천三川을 따라 전주 시내까지 연결된 곳이었다. 그 이름표는 시내버스 정거장이 있는 길 초입에 문패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타원형 방부목에 긴 각목을 지주로 박아 세웠다. 구름무늬 테두리를 배경 그림으로 그렸고 중앙에 ‘조팝나무명품길’이라고 적었다.
그때도 그 이름이 좀 뜨악했고 불편했다. 하지만 특별한 그 무엇이 있겠지, 호젓하고 사색하기 좋은 길일 수도 있겠거니, 어림짐작해 보다가 곧 잊어버렸다. 그것보다는 다음 해 봄에 조팝나무꽃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겠다는 설렘이 앞섰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순백의 조팝나무꽃! 들판이나 야산에 뭉게구름처럼 둥실둥실 무리 지어 향기를 선사하던 꽃!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흔전만전 피어난 꽃 무더기에 마음을 위로받았던 정겨움이 남았다.
기실은 그 무렵 논밭에서 고부라져 농사를 일구던 내 어머니와 가족들이 그리운 것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일하던 들길을 맴돌며 새하얀 꽃을 한 움큼 훑어 코끝에 대어보기도 했고 민들레 씨앗처럼 ‘후후’ 불어보기도 했다. 좁쌀처럼 작은 꽃들이 종알종알 붙어 마치 꽃으로 만든 방망이 같았다. 줄기째로 꺾어 휘휘 흔들면서 청보리 밭길을 걷노라면 그 향기에 젖어 내게서도 덩달아 달콤한 향기가 났던 시절이었다.
조팝나무길 이정표를 보았던 이듬해 봄이 되었다. 모악산 아래 중인동 골짜기는 무릉도원을 방불케 했다. 산밑으로 복사꽃이 분홍 안개처럼 내려앉았고 산 정상에서 쉬던 구름이 걷히거나 봄비 갠 후 풍경은 선경이 따로 없었다. 폭폭이 진경산수화이거나 투명한 수채화였다. 연둣빛 배경에 우윳빛 배나무 꽃이 봄날의 정취를 한껏 무르익게 하였다.
이 무렵 조팝나무꽃도 만개했겠다 싶은 어느 저녁나절이었다. 도심 저쪽에 무르익는 석양을 마주하며 조팝나무명품길로 접어들었다. 앙증맞은 꽃송이들과 가슴속까지 들이마시고 싶은 은은한 향기, 어린 날 추억 속의 꽃동산을 추억하며 천천히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아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고이 간직했던 한 꿈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방천길 양옆에 조팝나무를 심기는 했으나 밑둥지 부분과 꽃이 필 수 있는 두어 뼘 정도만 남기고 싹둑싹둑 무질러놓았다. 초등학교 시절 단정하라는 명목으로 눈썹 높이에 맞춰서 반듯하게 잘랐던 내 단발머리 같았다. 이 나무의 생명력은 가늘고 긴 줄기로 너울너울 우거져서 보기에 따라서는 낭만적일 수도 있는데 그 목숨줄을 짧게 잘라 버렸다. 꽃에도 영혼이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비명을 질렀을 풍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명품이라고 명명해 놓고 실상은 ‘조팝나무 싹둑 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처사를 묻고 싶었다. 그렇게 한 데는 분명 그들만의 명분이 있었겠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칭을 붙였을지. 허망하게 부서진 내 꿈 조각들을 주섬주섬 추스르며 둑길 아래 계곡을 바라보고 한참 동안 걸었다.
방천길 아래 계곡을 바라본 심정은 더 무거웠다. 조팝나무꽃 길에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들과 산은 무릉도원이었는데 어느 물줄기의 최상류라고 할 수 있는 골짜기에 회수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흐르는 물과 섞여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헌 타이어, 짝 잃은 운동화. 떠내려가다 걸려서 보를 만든 비닐류, 조각난 스티로폼, 큰 병, 작은 병, 플라스틱 조각들…. 물 따라 흘러가면서 인간 세상에 해害를 끼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솔솔 밀려왔다. 지난날의 추억이나 그리움 따위는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사실 내게 길이란 명품 같은 무정물이 아니었다. 길은 스쳐서 지나는 공간일 수도 있지만 시시각각 살아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길흉화복 소통의 통로일 수 있겠고 기다림의 길목이며 만남의 광장이다. 변화하는 역사의 흔적들이 연결되고 쌓이는 곳이다. 그런 길 이름에 굳이 명품 따위를 붙여서 오히려 궁색해질 필요가 있을까. 쓸쓸한 기분으로 터벅터벅 걸어 돌아오는 길에 그래도 두어 뼘씩 이나마 소곤소곤 피어난 꽃송이에서 은은한 향기가 실낱같이 전해졌다. 너무 모난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정읍 쪽으로 한동안 출근하면서 ◦◦명품길은 처음 본 이후로도 간간이 바라보고 다녀야 했다. 혹시 명칭에 대한 과민반응이 일어나려고 하면 그 대신 내게 오래 깊은 감동을 주던 길 이름 몇 개를 후딱 떠올렸다. 언젠가 보았던 ‘숨길’ ‘바람 쐬는 길’ 등은 듣기만 해도 숨이 후 쉬어지고 신선한 바람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꽃밭정이길’을 생각하면 마을 우물가 어디쯤엔가 예쁜 꽃이 피어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내친김에 ◦◦명품길이 저수지를 끼고 걷는 길이라면 ‘◦◦ 물바라기 길’ 같은 명칭은 어땠을까. 몇 년 전에 보았던 조팝나무 명품길은 ‘조팝나무꽃 향기길’ 등의 순한 이름이었으면 바라보는 사람들이 훨씬 폭넓은 사유를 하지 않았을지 혼자 오지랖 넓게 중얼거려 보았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3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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