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섯!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2월 30일
|
김숙
전중등학교장
tvN story 채널에서 재방 드라마를 시청했다. 2019년에 방영했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 「사랑의 불시착」이었다. 이야기는 세리스초이스 회사 대표 윤세리가 신제품 최종 테스트를 위해 직접 패러글라이딩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비행 중 느닷없는 돌풍에 떠밀려 주인공 세리가 북한 땅에 불시착하면서 사건이 얼크러진다. 한동안 코믹하거나 달콤한 러브스토리에 대리 만족할 것에 흡족했다. 좋아하는 간식을 한 바구니 구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조금씩 야금야금 즐기려던 찰나, 반짝 눈에 띄는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3화 38분쯤 장면에 나타난 교통 표지판이었다. 설정 장소는 인민무력성 경무부 10호 초소 앞, 하늘엔 인공기가 펄럭였고 보초병들은 출입자를 검문하고 있었다. 차단기 중앙에 정자체로 굵게 쓴 “섯”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붙여져 있었다. 작가의 세심함에 감탄하다가 문득 오봉옥 시인의 시 「섯!」의 실황이 오버랩되었다.
우리를 숨죽이게 한 건 38선이 아니었다/ 검문하러 올라온 총 든 군인도/ 검게 탄 초병들의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었다/ 기찻길 건널목에 붉은 글씨로 써놓은 말 섯!/ 그 말이 급한 우리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두 다리로 짱짱히 버티고 서 고함을 지르는 섯,/ 그 뒤엔 회초리를 든 호랑이 선생님이/ 두 눈 부릅뜨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커다란 방점이 떠억 하고 찍혀 있는 것 같았다/ 멈춤 정도야 뭐 말랑말랑한 말로 느껴질 뿐이었다/ 섯에 비하면 정지나 스톱 같은 말도 그저/ 앙탈이나 부리는 언어로 느껴질 뿐이었다/ 남에서 올라온 내 발 앞에 꽝,/ 대못을 박고 가로막는 섯!/ 그 섯 가져와 자살 바위 옆에 세워두고 싶었다/ 그 섯 가져와 기러기 떼 날아가는 노을 속에/ 슬그머니 척, 걸어두고 싶었다 - 오봉옥, 「섯」
시인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으로 북한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기차 건널목에서 “섯”을 보았다. 일단정지하라는 순우리말이었음에도 남한에서는 상용하는 말이 아니어서 서먹했다. 그 어떤 억압 기제보다 강렬해서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경악했다. 특히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로 뭐든 신속하고 급하게 이루려는 습관이 있어서 어서 지나가야 하는데 “섯!” 하고 너무 강력하게 제지하는 뉘앙스여서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오 시인은 “두 다리로 짱짱히 버티고 서 고함”을 치며 “발 앞에 꽝, 대못을 박고 가로막”는 이 외마디 비명 같은 글자를 다른 멈춤으로 확장한다. 인류가 문명을 외치면서 근대를 발전시켰고 요즈음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그 질주를 가속화 하는 시점을 지적했다. 과거 5천 년 동안 변해 온 속도보다 최근 몇 십 년 변한 속도가 훨씬 빨라 그 폐해로 이젠 자연이 거꾸로 인류를 공격한다. 빙하가 녹는가 하면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등 자연의 생태계가 바뀌는 게 안타깝다. 그것은 인간 중심 우월적 사고에서 비롯한 것으로 뒤돌아보고 멈춰야 한다. 만물을 맘대로 하고 자연을 훼손한 결과 인류는 역공당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정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가에 대한 반성과 문명을 비판한 시가 “섯!”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살아가는 존재가 모두 주인이다”라는 그는 ‘섯’을 가져와 “자살 바위 옆에 세워두고” “기러기 떼 날아가는 노을 속에 슬그머니 척, 걸어두고 싶었다.”라고 의사 진술한다. 말놀이 이상의 표현으로 우리 현대사회가 갖는 문명의 이기를 역설한다. 내게도 “섯”과 같이 일단멈춤 경험이 있다. 물론 북한 초소의 일단정지와 시인의 거대 담론과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멈춤에 대한 절박함에는 맥락이 같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문명의 발달에 가속 페달을 밟은 것같이 개인인 내 삶도 쉼 없이 주행했다. 팍팍한 현실을 극복하겠노라고 꼭두새벽을 달렸고 달 뜨는 저녁에도 뛰었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직장에서 퇴임이 임박했을 때마저도 의연하게 수용하면서 은퇴 후까지 여일하게 정주행을 기대했다. 인간의 삶도 달렸던 길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관성의 법칙 같은 것을 믿었을까. 아주 틀린 건 아니었지만 맞지도 않았다. 또 다른 출발은 불규칙하고 불확실했다. 일찌감치 일터로 나가고 되돌아왔던 동선은 흩어졌다. 유의미한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고 어떤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도 궁리했다. 깊이 넣어 두었던 모모한 자격증들을 챙겨보다가 취미 삼았던 것을 지속이 가능한 활동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 오만 상상을 곁들였다.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천장에 이것저것 나열해보았지만, 묘수는 없었고 어느 순간 자신감 없는 말풍선만 뭉게구름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그럴 즈음에 우연히 멘토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이가 말했다. “선생님, 여기서 Stop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멈추라니. 그럼….” 극단의 메시지가 뛰쳐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상대방 시선을 마주 보았다. “네. 지금까지의 길을 분리하는 겁니다.” 드라마 속 재벌 상속녀 세리가 불시착한 곳은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1,000m 부근이었다. 그곳엔 비무장지대 초소가 있었다. 북한군 5중대의 위수 구역으로 윤세리는 그곳에서 특급 장교 리정혁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돌개바람을 타고 “강림”했다는 윤세리를 어쩌지 못하고 감춰주다가 사랑하게 되었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러브스토리와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력이 일품이었다. 북한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남북한을 넘나드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접하면서는 실제로 우리가 오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도 상상해 보았다. 리정혁과 윤세리의 알콩달콩한 케미스트리도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특히 “바람이 왜 부는 것 같아요? 지나가려고 부는 거예요. 머물려고 부는 게 아니고. 저게 저렇게 지나가야 내가 날아갈 수 있는 거고.”라거나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대요.”라는 대사는 드라마 전체를 관통했다. 남자 주인공 리정혁의 “일없소.” 그의 부하나 주민들의 “후라이까지 말라우.” 등의 대사가 드라마를 찰지고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형을 위한 노래」 피아노곡 삽입 등 OST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 귓가를 맴돌았고 다음 방영 시각을 기다리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래, 드라마란 이런 거지.’라며 고개 끄덕였던 작품을 새로 접하면서 “섯”이라는 표지판 앞에 잠시 일단정지했다가 다시 드라마로 시선을 옮겼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4년 12월 30일
- Copyrights ⓒ주)전라매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오피니언
가장 많이본 뉴스
기획특집
포토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