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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추도하며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06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마을을 들어서니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긴 여름날의 푸르름이 사위어 가고 이파리마다 발그레한 가을 물이 들기 시작했다. 주홍빛 감을 팔이 늘어지게 달고 있는 감나무 이파리도 푸석하게 윤기를 잃어가면서 알록달록 색동저고리로 갈아입었다. 솔뫼 넘어가는 매봉재 언덕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은행나무 머리에 새벽마다 누군가가 몰래 노란 물감을 덧뿌려 놓았다. 큰댁으로 오르는 오얏재 길섶으로 수북수북 얼굴을 내밀고 있는 들국화가 자줏빛 날개를 달고 샛노란 얼굴로 길손의 눈길을 잡아끈다. 청초하다. 깊어진 푸른 하늘가에 억새가 은빛 머리를 털고 있다. 아버지 젊은 날 등에 옹이가 박히도록 오르내리던 길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셨다가 1·4 후퇴 때 정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간신히 돌담을 두르고 외풍을 가리고 있는 오두막집 문간방에서 초근목피로 가난을 견디며 살았다. 달이 뜨면 늑대의 울음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산짐승이 어둠을 헤집고 다녔다. 괴나리봇짐과 두 발로 어디든지 가야 했던 시절, 목기 장수 할아버지는 재를 넘어 부지런히 오일장을 넘나드셨다. 그러한 발버둥도 잠시, 서른일곱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독자 아버지 그리고 고모님 두 분을 남겨두시고 세상을 먼저 떠나셨다. 아버지가 가진 것이라고는 목기 장수 할아버지가 유물처럼 남겨두신 지게 다리가 전부였다.

열여덟 나이에 가장이 되어버린 아버지는 장작 장사를 시작하셨다.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저녁이면 달빛에 시퍼런 도끼날을 세워 장작을 팼다. 고단함으로 잠시 눈을 붙이고는 새벽닭이 울기 시작하면 십 리 장터 길을 장작을 지고 내달렸다. 지게는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한 몸처럼 아버지와 붙어 다녔다. 봄이면 냄새나는 거름더미와 장군을 지고 뙈기밭을 드나들었고, 모내기 철이면 모춤을 발채에 지고 논바닥에 날랐다. 여름날이면 잎담배를 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얏재 길을 올랐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들판의 볏단을 지고 앞만 보고 길을 오르셨다. 장정들이 줄을 지어 비탈길을 오를 때면 지게 다리까지 늘어진 실한 벼이삭이 서로 몸을 비비며 사락사락 여문 소리를 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철 아궁이 양식을 위해 뒷산을 하루 두 번 올랐다. 작은 재, 큰 재, 바른 재를 넘고 불무골, 성지골, 서당골을 드나들며 땔감을 거두고 나뭇짐을 꾸려 냈다.

아버지는 오로지 등짐으로만 칠 남매를 키워내시고 대학까지 배움의 길을 열어 주셨다. 너른 등에 지게 자국이 화인처럼 검게 박힐 때까지 일손을 놓지 않으셨다. 이 길을 등짐으로 오르셨던 아버지는 저만치 등짐을 내려놓고 봉초 한 대 말아 피우면서 젖은 땀을 식히고는 하셨다.

대문을 들어서니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모처럼 객지에 나가 있는 일곱 남매 내외가 모이니 조용했던 고향 집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그란 갈색 뿔테안경을 쓰고 머리가 허연 중절모 쓴 노인네가 벽에 걸린 채 웃고 있다.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앉아 있는 사진 속 아버지가 아들을 반긴다. 온 가족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다. 다른 일에는 서로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지라도 가정의례는 늘 큰아들 방식에 따른다. 예배를 마친 후 다들 한 가지씩 아버지 생전에 함께 했던 기억에 남는 일을 나눈다. 즐겁고 좋은 일보다 아프고 맺힌 이야기가 많다. 가난과 서러운 굴곡을 건너온 아버지가 있었기에 남겨진 이야기도 많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집 안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주변도 돌아본다. 아직도 손길 닿는 곳마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고 흔적이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헛기침하며 대문을 들어설 것 같다. 태산 같고 대들보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가 여든을 넘어서자 한없이 작아 보이고 슬퍼 보였다. 아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얼굴을 닮는다고 한다. 그뿐이랴 생활 습관까지 닮아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길에 들어서 있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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