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를 바라보면, 兎死狗烹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는 천하공물설 (天下公物說)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 하사비군론 (何事非君論) 모두가 함께 사는 평등 세상 대동사상 (大同思想)은 아직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한 죽도 선생의 신념이고 철학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2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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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부터 산죽이 많이 자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를 죽도(竹島)는 해발 430여 m의 진안고원을 휘감고 흐르는 금강 상류의 육지 속 작은 섬(?)이다. 운장산 맑은 물길과 천반산 절경에 휩싸인 그곳은 남쪽 장수천과 동쪽 무주천이 만들어낸 청정의 순수 덩어리 그 자체다. 스트레스 많은 요즘 맑은 물 상쾌한 공기 속에 머물며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심신 수련과 사색의 시간을 갖기엔 안성맞춤이다. 특히 최근에는 오염되지 않는 자연경관과 아름다움에 반한 내방객들의 입소문이 그곳을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다. 그곳의 매력에 빠져 자신의 아호(雅號)조차도 ‘죽도’라고 했던 430여 년 전의 선비도 있었으니 그곳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자신이 모시던 선조에게 미움받고 그가 속했던 서인에게 버림받아 힘든 고통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던 정여립(鄭汝立, 1546~1489)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전주 남분 밖 상관에서 태어났지만 관직을 그만둔 후 귀향하여 김제 금구에 살면서 죽도를 죽도록 사랑했기에 곳곳에 그의 흔적과 얘기들이 전설 되어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과객을 홀린다. 움막을 짓고 힘든 시간을 독서로 소일했던 죽도 서당,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대동 화합하는 친목 단체 대동계, 그리고 매월 힘찬 무술 시합 후 막걸리 한 사발씩 마셨던 심신 단련, 그가 말을 타고 달렸다는 천반산의 뜀 바위, 12,000여 평 정도의 구릉지인 산성터,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계원들과 함께 왜구를 토벌했던 충정 등이 얼마나 죽도를 아끼며 사랑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마침내 43세로 그곳에서 죽었으니 그의 죽도 사랑은 ‘죽도 선생’으로도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진안 골짜기의 일들을 역모라며 천 리 밖 황해도 해주에서 고변한 참소로 풍비박산이 났으니 죽도 사랑이 엄청난 대역죄가 되어버렸다. 그의 자살설과 자살 위장설, 대동계가 반역 모임인가 단순한 친목인가, 진실로 정감록을 믿고 도참사상을 퍼뜨린 것인가 등에 대해 견해가 갈리고 있고, 국가 역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해 혼란을 부채질하는 상황이다. 갈수록 그럴듯한 얘기들이 확대 재생산되어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어지러웠던 시기에 패자는 전멸하고, 오직 승자만이 자기 편에 유리하게 짜 맞춘 역사였기에 우릴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갑론을박의 현실이다.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는 경구처럼 실체는 복잡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여러 요인을 종합해보면 합리적인 추측은 가능해진다. 벼슬에서 쫓겨나 울분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정철은 부름이 없음에도 자진 입궐하여 선조를 충동하는 비밀차자(秘密箚子)를 올린다(1589.10.11.). 역적들이 군부(君父)를 모해하려고 한다는 약식 상소에 “경의 충절을 알겠으니 마땅히 의론하여 처리하겠다.”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영의정이 되고 정여립 사건을 총괄할 ‘위관(委官)’에 임명된다(11.8). 요즘의 특검 단장격인 셈이다. 충성심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에 그가 휘두른 칼춤에 수많은 주검만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친척이기에, 그와 교신한 편지 때문에, 눈병 때문에 흘린 눈물을 슬퍼서 울었다고, 자신과의 평소 사감 때문에, 심지어 자백하면 살려주겠다고 속여서 죽이고 귀향 보냈다. 무고로 붙잡혀온 휴정과 유정도 선조가 친국(親鞫)을 했던 한풀이였다. 조선의 4대 사화 때 희생된 숫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전국의 인재 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설령 그 고변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단순한 모의에 불과한 데다가 아무런 물증도 없고 당사자 정여립마저 사라져버린 허상을 향해 그렇게도 난도질을 했으니 관동별곡 사미인곡의 정철이 제정신이었나 싶다. 한 때는 “백관의 독수리” “대궐의 맹호”라고 극찬하면서 이를 왕권의 강화로 이용하려 했던 선조였지만, 마구 날뛰며 광기에 찬 그를 간철(간악한 정철)·독철(독한 정철)·흉철(흉악한 정철) 등으로 비난하고 만다. 닥치는 대로 죽여버린 정철에게 거는 제동이었다. 마침내 세자책봉 문제로 눈 밖에 난 정철은 강계로 유배되었고 결국은 강화도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고 만다. 충절을 위한 칼춤에 자신도 꽂히고 말았으니 사냥이 끝나고 식탁에 올려지는 사냥개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혼란한 천하의 통일을 위해 그렇게도 동분서주하며 싸웠던 한신이었지만 끝내는 반역의 누명으로 처형되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가 무소불위의 정철을 비켜 가지 못하고 말았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너무 커버린 동인을 견제하려 했던 선조의 꼭두각시였지만 막상 동인이 사라진 자리에 더 큰 괴물이 되어 웅크리고 있는 동인 정철을 선조는 왕권에 대한 장애물로 여긴 것이다. 글마다 절절했던 자연 예찬과 임금에 대한 충정 그리고 백성 사랑의 애민은 다 어디로 가고 칼끝에 그렇게도 많은 피를 묻히며 억울한 죽음과 통탄할 원성을 남긴 괴물이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도 3년간(1589.11.~1591.5.)이나 긴 세월을 정철은 사람 잡는 백정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임진전쟁(1592) 한 해 전까지의 일이었다. 승려로 위장한 일본 간첩 겐소(景轍玄蘇)가 조선에 입국하여 국내 사정을 정탐하던 때이기도 했으니, 정말로 한심한 작태들이었다. 게다가 동인 서인 간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서로 다르게 보고한 데다가 침략할 것 같다는 정사 황윤길(서인)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오직 귀에 솔깃한 부사 김성일(동인)의 입만을 믿고 말았다. 30만의 왜군이 밀물처럼 밀려온 7년의 임진 전쟁에 단서를 제공한 기축옥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 강토는 말발굽에 쑥대밭이 되고 백성은 허리가 잘려나가는 죽음을 당해야 했으며 선조 자신도 압록강변 의주까지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명나라로의 망명을 꿈꾼 선조를 향해 백성은 돌팔매질했지만, 정철은 그렇게도 충성하며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읊으며 그리워했으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는 정철이었는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전라도를 반역의 땅으로 만든 결과는 무엇이었냐고 천반산에 묻고도 싶다. 할 말이 너무나 많은지 그곳을 휘감아 흐르는 죽도의 물살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죽도록 아픈 세월 겨우 잊고 말없이 흐르는 물살 위로 기우는 서녘 노을이 죽도를 찾는 과객을 내몬다.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모두가 함께 사는 평등 세상 대동사상(大同思想)은 아직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한 죽도 선생의 신념이고 철학이다”라고 맑은 바람에 귀띔하면서.
/양 태 규 옛글 21 대표 |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2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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