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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에 꽃 피던 날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12일
애기똥풀 미술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 공방에 가야 구할 수 있는 염색 천이 있어서였다. 시내를 벗어나 춘향로로 접어들었다. 우측 차창 가득히 고덕산의 봄 산빛이 몰려왔다. 저 산밑으로 한벽寒碧터널을 빠져나온 전라선 철길이 지나갔다. 산과 기찻길 사이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야트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철길 구간이 일부 변경되었는데 과수밭들은 여전했다.
한창인 복숭아꽃밭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춘향로를 지나자니 17번 국도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저 길을 따라 남원을 거쳐 구례까지 동료 서너 사람과 출퇴근했던 시절이 새삼스럽다. 지나간 모든 것은 그리워지는 것일까? 마음이 1990년대 초 어느 중학교 교무실로 향했다. 고목에도 꽃이 필 수 있음을 보았던 날이었다.
“전주에서 오던 길에 복사꽃 폈습뎌?”
“….”
“복사꽃 피면 서울 갈라우.”
“….”
“기차 타고 가야것구만요.”
“….”
“마누래 보러 갈라요.”
“….”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뇌인 사람은 우리의 교감 선생님이었다.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 대화는 금기사항쯤으로 여기던 이가 불쑥 던진 꽃 타령은 아이러니였다. 도의적으로 답해야 할 것 같았던 시선들이 허공에서 잠시 부딪혀 소요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것은 춘래불사춘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필귀정이라 해야 맞을 수도 있었다.
언젠가 직원 연수를 다녀오던 버스 안에서였다. 젊은 선생들의 웃음소리가 경망스럽다고 그이는 귀를 틀어막았다. 버스 통로 선반에 걸어 둔 화장지를 뜯어 귀를 막고 입도 닫았다. 버스가 종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는데 땡감 씹은 표정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학교 안팎을 순시(?)했는데 복도를 지나갈 때는 환기를 해야 한다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괘도 지시봉 끝으로 “탕” 소리가 나게 창을 밀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가만가만 걸었지만, ‘나 여기 있소.’라는 흔적을 남겼다. 구시렁대는 소리가 무슨 경을 읽거나 얄궂은 주문을 외는 것처럼 들렸는데,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덕담을 했던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교사들끼리 차라도 한 잔씩 나눌라치면 몹시 못마땅해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하고 조심히 물어보면 “나 커피 그까짓 것 안 먹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러다가 크게 생각이라도 한양 “줄라면 대접으로나 하나 가득 주든지….” 교무실에 대접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농담인지 거절인지 모호했다.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슬며시 올려놓으면 백지로 덮어 놓았다. 그 커피를 마셨는지, 버렸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다 간식거리가 생기거나 특별한 행사 끝에 먹을거리를 가져온 이들이 있었다. 웃어른으로 먼저 챙겨주면 “나 그런 거 안 먹어요. 공짜 안 좋아해요.”라고 정색했다. 요즘 신세대 교사들이 들으면 “미친 거 아냐?”라고 쌍방을 비아냥댈 수도 있는 웃픈 과거사의 한 장면이다.
일기예보와 다르게 밤새 눈이 내려 사선을 넘듯 지각 출근했던 일이 있었다. 혹시 수업결손이라도 끼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카키색 와이셔츠의 교감은 가슴에 몹쓸 징을 박아 주었다. “이런 날은 더 일찌거니 출발했어야지.”
그의 체구는 왜소했다. 얼굴도 조그마했고 피부는 술과 담배 때문이었던지 거무칙칙했다. 가늘고 작은 눈에 금속 테 안경이 주는 인상은 11월에 부는 시린 바람 같았다. 옹송그린 자세는 늘 소화불량증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넥타이와 와이셔츠는 아주아주 어두운 카키색 일색이었는데 때가 끼어도 안 끼어도 그게 그거로 보이는 일종의 보호색이었을지, 취향이었을지.
들리는 말로는 너무나 꼬장꼬장하여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가족인들 오죽했으면 여북했을까?”라고도 했다.
또 건너 건너 들려온 말을 빌리자면 두뇌가 명석하여 그 옛날에 구례에서 전주로 유학했단다. 당시에 그는 석탄을 때서 움직이는 기차를 타고 콧구멍이 시커멓게 되도록 학교에 오고 갔다. 그 기찻길 옆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이맘때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리라. 아마도 그 시절 빛나던 청춘, 꿈과 야망, 지나간 세월의 낭만이 그리워서였을까. 하여 그 지점을 통과해 출퇴근했던 우리에게 복숭아꽃 소식을 물었던 것일까?
그는 평교사 시절 과학 교사였다. 그래서였는지 유머라고는 “비 온도가 몇 도인지 아요?” 정도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면 “비가 오도다.”라고 혼자 말했다. 썰렁하기 그지없는 아재개그였지만 달리 보면 온도를 물어봤으니 지극히 과학적인 사유의 소유자였을 수 있다. “비가 오도다”를 내리는 것의 의인화로 해석하면 문학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화사한 꽃 소식을 묻던 그 시절, 교육계는 군사문화와 관료주의가 잔존 했다. 민주적인 학사행정보다는 젊은 교사들을 철저한 관리 대상으로 여겼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신념과 의지를 내세워 젊은 교사들을 잡도리(?)하는 것이 권위라고 착각했을 수 있다. 그것이 카리스마 넘치는 관리자의 지당한 본분쯤으로 여겼을 수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웬일로 복사꽃 피면 서울 가겠다며 그야말로 사사롭거나 연민에 찬 인간적 속내를 드러냈다. 나이테 깊숙이 묻어두었던 외로움의 응어리가 꽃봉오리 부풀 듯 부풀었다가 제풀에 터지기라도 했을까.
미술학교 선생님은 진초록 염색 천을 먹물로 재염색하고 있었다. 염색물에 잠긴 천의 색이 그때 그 교감의 때에 절었는지 아닌지 아리송했던 어두운 셔츠 색과 비슷했다. 그 셔츠의 색에는 영 호감이 가지 않았는데 공방 선생님이 물들이는 직물의 색은 원색의 야망을 가라앉히고 삼라만상을 키워 낼 차분한 대지의 품 같은 색상으로 느껴졌다. 사실 셔츠 색과 직물 색의 본질은 같을지도 모르는데 사물 또는 특정 인간을 바라보던 내 상황과 편견이 부정과 긍정 사이를 오고 가면서 차이가 생겼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고목에 꽃 피듯 뜬금없이 환한 질문을 했던 이에게 “네. 지금 철로 주변에 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어서 기차표를 예매하시죠. 주말에 올라가시렵니까?”라고 흔연스럽게 응대하지 못했음에 분홍빛 부끄러움이 돋는다.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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