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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2-8)] 시詩 밭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5월 07일
고구마 순을 추어올린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마디에 서린 인 연들이 사정없이 뽑힌다. 쇠해지는 귀뚜라미 소리에 까마중도 제 온 곳으로 갈 채비를 하는 텃밭. 수돗간 옆 자두나무의 늦여 름을 갉아먹은 쐐기벌레가 미끄러진다. 내 생의 실타래도 덩달 아 아득한 기억 너머로 미끄러진다.
옆구리를 쏘인 것 같은 통증의 시간. 나는 내 옆구리 갈비뼈 어디쯤 쐐기 한 마리가 오래도록 살았다. 시도 때도 없이 따끔거 리면 그 통증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아마 그때부 터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텃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아졌던 것 같다. 텃밭에는 철 따라 고추와 호박이, 그리고 잠자리와 귀뚜라미가 벗으로 찾아와 내 통증을 차츰 거두어 갔다. 감나무에 매달린 무거운 호박을 건사하는 가 냘픈 넝쿨손의 옹골참을 보면서 감당하지 못했던 이별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사그라졌다.
‘지나가 버린 일을 헤아려 보네~’ 손전화 컬러링이 텃밭에 울 려 퍼진다. 방아깨비가 더듬이를 들어 낯선 소리를 벗겨낸다. 틀 림없이 교장으로 재직 중인 지인이지 싶다. 토요일만 되면 전화 하는 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나는 늘 그에 게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는 지청구를 듣는다. 다시는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다짐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전화가 올 곳도, 기다려지는 전화도 없기 때문인데, 오늘도 그에게 지청구 를 들을 것 같아 휴대전화를 가을볕에 걸어 두었던 터다.
그러나 폴더 폰을 쓸 때는 기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스마 트폰으로 스마트하게 교체하라고 전화를 해대는 통신사 여성 들의 목소리다. 딱히 여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없는 나로서는 그 여성들은 귀한 분이었다. 지금이야 호객 전화인 것 같으면 예고 없이 끊거나 받지 않지만, 그때는 따박따박 대답을 해주었다. 친 절한 내 응대에 처음엔 호감을 갖고 상품 설명을 하다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땐 퉁명스럽게 끊거나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추어올리던 고구마 넌출을 놓고 매화나무에 걸어놓은 전화 기를 향해 간다. 받기도 전에 끊긴다. 액정에 나타난 이는 예상 대로 y 교장이다. 다시 벨이 울린다. 컬러링이 소음으로 들리는 것인지 돌확에 앉아 쉬고 있는 방아깨비가 몸을 돌린다. 가만 바라본다. 저 더듬이 사이로 여름이 머물다 가고 가을이 찾아왔 을 터, 오가는 것에 가슴 아파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 나간다.
통화버튼을 누른다. “배 선생님, 학생들 시화전을 하는데 선 생님의 시도 몇 편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y 교장의 목소리다. 전화를 늦게 받는다며 한소리할 줄 알았 는데 의외다. 긴장했던 귀가 귀뚜라미 소리 뒤끝처럼 순해진다. 그러나 웬걸 끝내 한마디 걸친다.
“아따, 근디 어쩐 일이다요, 전화를 두 번만에 받고?”
“전화기를 매화나무에 걸어 놓고 고구마 순을 추어올리고 있 었습니다.”
“늘 말하던, 그 시詩밭 말이오?”
저물녘 막걸리 한잔하자는 y 교장의 말에 가을볕 서두르는 한나절이다.

/배귀선
시인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5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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