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시인의눈]<肉筆육필>의 아름다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1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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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시는 물론이고 시평을 원고지에 정성스레 쓰인 성기조 시인의 육필원고를 접하고 있다. 요즘 세상이야 전자메일이나 자판을 두들겨 출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보면, 肉筆詩稿가 주는 향기를 그때마다 맡을 수 있어 眼福이 아닐까 하는 즐거운 생각이다.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구상, 정진규, 박재삼, 정렬, 최승범 같은 원로 시인들의 육필시고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육필원고를 읽다 보면 시도 그렇지만 원로시인의 체취가 배어들어 있는 기가 전율로 감지되어지곤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因緣生起>라, 모든 존재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불교의 근원적 세계관이 아니라도 시 정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하는 실체로 작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시와 삶에 대하여 시인, 혹은 예술과 철학의 일화에서 뛰어넘어 하나의 시적 정신세계를 형성하게 한 그들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시 세계를 더욱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마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존경>은 충만이고, <동경>은 결핍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거나 관계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인연을 통한 緣起의 세계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 그 生起로서의 존재 추구와 인식이 그대로 닮아서 실천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리라. 오늘날의 문단은 문인양성소 같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문인으로 등단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학에 대한 접근성이 책 읽기, 글쓰기를 손쉽게 만날 수 있게 하는 이점이 있다면, 시인 스스로의 시 세계 혹은 시정신의 성찰과 깨달음까지는 무리라 해도, 시적 능력과는 무관하게 어설픈 글들이 양산되는데 문제가 있다. 이성복 시인은 ‘시가 닿는 지점이 불가능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라는 것이 본래 불가능을 표현하려 애쓰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라 말하면서, ‘실패하지 않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시 쓰기는 늪 속의 허우적거림처럼, 사막에서의 제자리걸음처럼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또한 몸의 철학적 담론을 체화된 인지라는 개념으로 소개한 마크 존슨은 <마음속의 몸>에서 ‘의미‧상상력‧이성의 신체적 근거의 의미에는 공간에서 명확한 방향을 부여한다.’라 말하고 있다. 여하튼, 글쓰기의 도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작품에 나타난 시적 공간이 흥미롭게 변화하기 마련인데, 같은 글이라도 컴퓨터로 활자화된 것보다는 육필원고가 훨씬 더 정감을 지니고 있어 보이기 마련이다. 거기서 시인의 체험에 의한 시간성, 현재성을 뛰어넘는 공간 의식의 변화까지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육필 이미지가 시적 이미지를 부르고, 의미가 의미를 부른다고 할까. 시인들의 육필시화전을 볼 때마다 <마음속의 몸>으로 서로를 건너다니는 정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글쓰기의 느낌, 아름다운 정감이 그것이다.
최영봉 시인 전북시인협회이사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1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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