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시인의 눈] 화이위조( 化而爲鳥) 이야기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1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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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새가 있다. 이 새는 신화 속의 새다. 그중 하나가 그리스와 라틴문학 속에 나타나는데, 생명이 다할 무렵에는 향기가 나는 나뭇가지로 둥우리를 틀고 불을 붙여 스스로 몸을 태워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불사조이고, 또 하나는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날개의 길이가 삼천리에 이르고 하루에 9만 리를 날아간다는 대붕(大鵬)이다. 상징과 비유가 어우러진 신화의 세계는 우리 인간세계로부터 아주 먼 심원한 경계를 암시하기도 하고, 한순간에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불사조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의 시학>에서 불, 불꽃, 불덩이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체험한 불의 심리학으로 우리의 고유한 삶에 어떤 솟구침으로 지탱해 주는가라는 원초적 이미지로 표출되고, 대붕은 장자의 <곤붕(鯤鵬)의 우화> 중에서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 됐다는 ‘화이위조(化而爲鳥)’라는 변화의 철학이다. 즉, 큰 물고기 곤(鯤)이 존재의 변형을 감행해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된 것이다. 우리 인생이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자아 성찰을 통한 깨달음의 긴 여정이라면 누구는 현실에 매몰돼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체 살아가거나 자신을 찾기 위한 가치를 꿈꾸는 몽상을 원하지 않을까. 물고기가 물고기로 살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을 것이며, 붕이 처음부터 붕으로 태어났다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건’만 있고 ‘의미’가 빠진 것은 공허하다. 곤은 곤이고, 붕은 붕일 따름이다. 물고기 곤과 붕이 하나로 만나야만 비로소 의미가 생겨난다.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바람의 흐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날개 밑에 그만큼 바람의 흐름이 쌓여야 아무 거침없이 날아갈 수가 있는 이치이다. 물이 곤이 노는 곳이고, 바람이 붕이 노는 곳이라 할 때, 물이 얇으면 큰 물고기는 헤엄칠 수 없고,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붕과 같이 큰 새는 날 수가 없다. 매미와 비둘기가 드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온힘을 다해서 날아올라도 박달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히고, 때로는 거기에 이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일쑤인데, 어찌해 붕은 구만리나 높이 올라 남쪽으로 날아가는가.” 모든 것은 자기의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행동도 다르게 나타난다. 매미나 비둘기 같은 미물이 대붕의 힘찬 비상을 알겠는가. 짧은 삶으로는 긴 삶을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 부조리와 편법과 술수가 대물림되는 세상에서 도덕적 통념과 상식은 삶에 얽매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이야기다. 장자는 ‘좁은 지혜로는 큰 지혜를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는 긴 삶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작은 지혜에 집착하다보면 큰 지혜를 놓치게 마련이니
/최영봉 시인 전북시인협회 이사 |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21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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