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e-전라매일 |
|
|
 |
|
| ⓒ e-전라매일 |
|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등이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의 항일(抗日) 애국열이 고조되었다. 박용만(朴容萬)·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동이 되어 그 해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 대회에서 미국에 흩어져 있던 애국 단체를 규합하여 통합 단체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편집자주
1. 『국민회』 - 해외 민족운동의 최고 기관 1908년 10월 30일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 7인과 본토의 『공립협회』 대표 6인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국민회』는 총회와 지방회의 두 종류의 조직체로 구성되었다. 미국 본토에는 북미 지방총회를 두고 하와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두었다. 북미 지방총회는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1909년 2월 10일 <신한민보>로 개칭하였고, 하와이 지방총회는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를 <신한국보>로 고쳐 지방총회의 기관지로 삼아 항일 애국사상과 교포들의 단결심 배양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결성된 『국민회』는 1910년 2월 다시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11년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4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이들 각 지방총회 밑에 각기 10여 개의 지방회를 거느리는 큰 단체로 성장하였다. 더욱이 멕시코·쿠바에도 지방회가 설치되어 재외한인 교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국민회』는 재미 교포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강탈당하자 9월 1일 한일병탄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일제의 야만적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1910년대 해외 민족 운동가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항일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우리 회 창립이/ 지금에 六년이라 二월 초하루는/ 百셰에 영원 기념 목적이 크도다/ 교육실업과 평등 종지가 크도다/ 조국의 독립 광복 미주와 하와이/ 대동단결한 후에 멕스코 원동은/ 동서에 셩셰연락 우리의 휘쟝은/ 무궁화 쳔추무궁 사해가 우러러/ -례로 좇는도다 이 회 아니 드면/ 의관을 어찌 보존 비 노니 상천이/ 항상 권고 하소셔 - 「축사-북미총회」, 1915. 2. 4, <신한민보> 이 해 이월 초 하루는/ 국민회 챵립 륙회로다 샹천이 또한 도우샤/ 하이 고 바람 잔잔 의기로 중심을 단결/ 태양을 보라 벽파만경 환난에 굴지 안코/ 홀연히 듕류에 돌기둥 태극기를 날림이여/ 그 영광 일월이 빛나네 누가 숭배 아니가/ 만셰를 불러 츔츄도다 -「축사-삭도지방회」, 1915. 2. 4 , <신한민보>, 위 두 편의 축사들은 『국민회』 창립 여섯 돌을 맞이하여 각 지방(북미, 삭도:Sacramento)에서 보내온 축사들이다. 창립 목적이 독립광복, 실업진발, 교육장려, 명예존중, 평등제창이라 천명하고 있다. 때문에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동포들에게 의기로 대동단결하여 태극기 날리며 춤출 수 있도록 상천(上天: 하느님)께 빌자’ 한다.
一 해외 한인 국민회는/ 우리민족 대동단결/ 튣븐강 거닐어서/ 북미대륙 터를 잡고 二 하와이와 멕시코를/ 손을 잡아 연락이라/ 우리 국기 보존하니/ 태극장이 두렷하고 三 우리 휘장 바라보니/ 무궁화가 찬란하다/ 만충일ㅇ 맹세하며/ 사해동심 흠앙하니 四 와직탕탕 청천벽력/ 그 호령이 엄숙하고/ 처르릉 철석 바다물결/그 세력이 팽창하다. - 작자 미상, 「기념가」 일부, <신한민보>, 1918.2.7.
‘하와이 국민회’가 창립기념일을 맞이하여 ‘하와이 국민회’와 멕시코가 손을 잡고 연대하여 우리의 ‘국기 태극장을 길이 보존하자’ 기원하고 있다.
2.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서간도 벌목가」 -열두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百目경뎐답은 척식사에 갔도다 서간도, 곧 남만주는 백두산 서쪽, 압록강 지류인 혼강 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1860년대 평안도 지방에 대흉년이 들어 집단 이주하는 한인(韓人)들이 많았다. 북간도 지역에 비해 한인수가 적고 토지 소유권도 없었지만 일제 세력이 깊이 미치지 못해 일제수탈에 밀려 고향을 등진 분들이 많았다.
도끼를 메고 문 앞에 나서니/ 푸르고 검은 돌이 겹겹이 쌓였다. 이돌 저돌 순서로 밟으니/ 싸리 짚신 바닥이 철철 미거진다. 머리 숙이고 심경을 생각하니/ 일보일보에 자연한 심회발한다.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심각하니/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경상도 본가를 곰곰이 생각하니/ 량젼옥답에 오곡이 흐즈려졌다. 문 앞에 말 매든 수양을 싱각하니/ 푸른 잎 일 만 가지 차례로 디럿다. 열두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百目경뎐답은 척식사에 갔도다. - 「서간도 벌목가-서간도에서 나무 찍는 노래」에서, 1913. 11. 7. <신한민보>
1893년부터 조선정부는 이곳에 관리를 파견하여 호세를 징수하며 자체 방어를 하였고 1902년에는 향약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던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향약소를 폐쇄하면서 서간도 지역 독립투사들의 대표적 망명지였던 이곳 서간도(남만주)를 관리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끝행 ‘척식사’란 1908년 일제 통감부가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하고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 회사의 줄임말로서, 조선 사람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이를 바탕으로 일본 농민들을 비옥한 한반도에 이주시켜 5할이나 되는 무리한 소작료를 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무리한 강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많은 한국의 소작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와 연해주 벌판으로 떠나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쫓겨 온 서간도 벌목군의 경우 ‘열두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百目경뎐 답은 척식사에 갔도다.’가 그걸 입증하고 있다. 경상도 본가를 떠나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량젼옥답에 오곡이 흐즈려졌고/ 문 앞에 말 매든 수양’ 부리던 ‘열두겨리 암소’ 등을 왜놈에 뺏겨 이곳으로 망명 온 <서간도 벌목가>의 작자는 일제의 수탈에 내몰려 이곳으로 온 항일 독립 인사(익명으로 발표한 것으로 보아)가 아닌가 한다.
|